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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천사와 악마



"……이건 좀 달라요, 질베르크. 단순히 루드비히 일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요."
"아뇨, 당신이 더 잘 알 겁니다. 다르지 않다는 걸요. 직전에 망설이던 당신 모습에서 보았습니다. 당신 역시 제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 사원으로 가는 게 더 시급하다는 질베르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있다. 그건 확실히 부정할 수 없었다.

루드비히 일에 유독 마음이 약해진다는 소리 역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왜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있죠, 루드비히의 사정을 저한테 대입해 봤어요."


엘레쥬가 옷 안에 숨겨서 걸고 있던 토파즈 반지를 주섬주섬 꺼내자 질베르크는 살짝 멈칫하며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시선을 빼앗긴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제가 이 반지를 줬던 친구를 알…… 그러니까 방금 그 추격자 기사한테 대입해 봤단 뜻이에요. 그렇게 해보니까요, 저라도 루드비히처럼 굴지 않았을 거라 장담 못 하겠어요."


엘레쥬 역시 루드비히의 의협심과 올곧음이 때로는 정말 숨 막히게 답답했다.

하지만 만약 자신과 에리카였다면 어땠을까. 에리카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오해해서 날 공격한다면.

물론 에리카가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러니까 가정인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가정해서, 만약 에리카가 알렌처럼 날 공격한다면 나도 똑같이 그 애를 공격할 수 있을까? 또, 혼자 몇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친구를 도우러 쫓아가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친구가 몬스터와 싸우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루드비히를 답답하다고 비난할 수 없어졌다.


"질베르크 페리도트."


토파즈 반지를 보고 있던 질베르크가 시선을 맞춰왔다.


"당신에게는 그런 사람…… 그런 친구가 없나요?"


그 말에 질베르크는 표정을 굳혔다. 엘레쥬는 대답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약속할게요. 사원으로 가는 일에 최대한 지장 없게 하겠다고. 몬스터만 신속하게 처리하고 알, 추격자한테 잡히기 전에 얼른 내빼면 돼요. 모두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사원으로 가는 건, 저야말로 가장 바라는 일이라고요. 그런 제 바람을 믿어주세요. 다 괜찮게 할게요."


질베르크는 다시 토파즈 반지에 시선을 주고는 크게 숨을 내뱉더니 마지못해 매직 실드를 해제했다. 프레드와 카디나가 바로 튀어 나가고 엘레쥬도 뒤따르려는데 질베르크가 붙잡았다.

앞서가던 두 사람이 다시 돌아보자 엘레쥬는 일단 먼저 가라고 손짓한 다음 뭐냐는 듯 질베르크를 보았다.


"한 사람을 희생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엘레쥬는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고 급히 눈에 힘을 주었다.

문득 어디선가 케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굴을 울리던 깊고 낮은, 우울함에 깊이 잠식당한 목소리.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나?'
'……넌 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널 속이고 있다면……'


질베르크에게 받은 질문의 무게는 그때 케니스의 질문보다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말 자체로만 보면, 케니스의 질문이 훨씬 더 직접적인데도.


"……아저씨 생각은 어떠신데요?"
"……숫자나 대소로 센다면 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래요? 그게 아저씨의 대답이라 이거죠? 어쨌든 그게 '옳다'는 게."


질베르크의 표정이 드디어 흐트러졌다. 통쾌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말한 '옳다'가 시비를 가르는 뜻이 아닌, 그편이 조금 더 낫다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현자도 가책을 느낀다.

그래, 어떻게 안 느낄 수 있겠는가. 안 느낄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겠지만 그 역시 천사이면서 동시에 악마다.


"……제 대답은 언젠가 알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이만하고 가요."


어쩐지 그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놔달라는 뜻으로 팔을 흔드니, 질베르크가 소매를 놓아주었다. 돌아서려는 엘레쥬를 향해, 그가 꺼질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간혹…… 저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엘레쥬는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벨을 보았다.


"벨, 가자!"


가만히 지켜보던 벨이 지나가자 엘레쥬는 비로소 다시 질베르크를 보았다. 제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길 바랐으나 그는 기대를 져버렸다.


"자신의 운명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왜 고통스럽지 않겠어요!"


순간적으로 조금 울컥해서 즉답이 나와버렸다.

내가 진짜 엘레쥬여도 고통스러울 텐데, 나는 진짜 엘레쥬가 아니다.

이건 내 운명이 아니야.

그런 생각에 정말 환장할 것 같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제 그만 좀 가요."
"……어른이 되면 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엘레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엘레쥬가 되지 않았다면, 엘레쥬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엘레쥬, 너는 어땠을까. 어쨌든 본인이고 주인공이니 물론 나보다 잘했겠지.

그렇다면 너는, 이럴 때 뭐라고 대답했으려나.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진짜 너였다면, 너는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네 몸에 내가 들어온 이상, 내가 굿 엔딩을 봐야 하는 이상, 너 역시 어른이 될 수 없는데 말이야. 돌아올 몸이 없어질 텐데 말이야.


"엘레쥬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엘레쥬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를 보았다.

이건 또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릴까.

봉인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현자는, 쥬얼 프린세스가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이 현자는 대체 왜 저런 잔인한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네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어차피 어른이 될 수 없는 쥬얼 프린세스에게 그게 할 말인가? 일말의 죄책감 때문에라도 제발 당신이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지는 못할망정?

너무 기막혀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질베르크는 먼저 돌아서서 일행들을 따라갔다. 딱히 설명할 생각도 없고,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엘레쥬는 차오르는 원망을 삼켰다. 그 맛이 너무 써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지금은 나쁜 놈보다 바보가 먼저야.


"루이스!"


정신없이 바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니 엘레쥬가 올 때까지 루드비히를 붙잡아두고 있던 프레드와 카디나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더 속력을 내 다가간 엘레쥬가 얼른 그 두 손부터 꼭 잡자 시선을 피할 듯 고개를 돌리던 루드비히가 움칫거렸다. 엘레쥬는 바로 사과부터 뱉어서 그의 눈동자가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루이스, 네 일이 내 일이라고 말한 주제에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그전에 네 친구를 공격한 것도. 널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래."


루드비히는 다시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화를 참으려는 듯이.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화가 나는 것이다.

이해할만하다. 엘레쥬도 공격당한 게 에리카였다면 저렇게 화 좀 내는 걸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 엎어버렸겠지.

아마 카디나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나도 사과할게. 하지만 루드비히, 나 역시 엘레쥬 말대로 널 돕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상류층 인간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넌 예외거든."


루드비히는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카디나는 씩 웃으며 그에게 어깨동무했다.


"뭐, 지금의 널 상류층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드비히, 같이 네 친구 돕자."
"그래. 하지만 모두가 안전할 방법으로 도울 거야. 물론 여기서 모두는 너를 포함하고 있어. 알았지?"


엘레쥬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루드비히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은 가서 상황을 볼 거야. 도울 필요가 있으면 나랑 벨, 카디나가 나설 거고. 프레드는 다친 사람이 있으면 내 가방에 있는 과일 젤리랑 곰곰 젤리를 나눠줘. 그리고 질베르크 씨는 여차하면 바로 도망칠 수 있게 이동 마법을 준비해주세요."


사원까지 텔레포트 할 수는 없다 해도, 알렌을 도운 다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잽싸게 튀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았다고 대답하며 동의를 표하자 엘레쥬는 마지막으로 루드비히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루드비히 넌 질베르크 씨 옆에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해줘."


루드비히는 당연히 다들 싸우는데 혼자만 숨어있을 순 없다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자 결국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지금 막 약속한 것을 잊고 또 튀어 나가려고 하기에 엘레쥬는 우악스럽게 그를 붙잡아 뒤로 밀고 벨과 카디나에게 손짓했다.

엘레쥬가 그 두 사람과 함께 선두를 달려 도착한 곳에는 피난민으로 보이는 실피드인 열댓 명 정도가 있었고, 그들을 지켜서고 있는 알렌도 있었다. 알렌과 대치 중인 몬스터의 수는 대략 피난민 숫자와 비슷했다.


"수가 많으니 우리 모두 덤벼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이 종료되면 내가 저 건방진 자식한테 파이어 랜스를 먹여 골로 보내주지. 도망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그 틈에 가면 되는 거다."
"알렌을 다치게 하지……!"
"그만! 잠깐 다들 조용히 좀 해봐! 생각 중이니까!"


엘레쥬가 윽박지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주변이 조용해지자 문득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냐아……!"
"앗! 저 몬스터는……!"


프레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고양이형 몬스터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어? 저 몬스터…… 전에 엘레쥬가 치료해준 아엘 아냐?"


카디나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몬스터의 다리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묘하군요. 전부 다 고양이형 몬스터입니다."


질베르크의 말에 엘레쥬가 네? 하면서 보자 그가 멀리서 알렌과 대치 중인 몬스터들을 고갯짓했다.

보니까 정말이었다. 고양이의 의인화 같은 아엘, 이족보행 하는 돼냥이 쇼콜라캣, 거미처럼 다리가 여럿 달렸고 입에서 거미줄도 뿜는 고양이 네꼬모시, 강아지 같기도 하고 찹쌀떡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토르까지.


"혹시 저 아엘이 불러온 건 아닐지……"
"역시 은혜도 모르는 몬스터 따윈, 치료해주는 게 아니었어요!"


프레드가 격분해 노발대발하는데, 엘레쥬는 문득 뭔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저 아엘을 따라가자."
"뭐? 그럼 저 사람들은?"
"내 생각이 맞는다면…… 저 몬스터들,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누나!"


멀리서 붕대를 감은 아엘이 다시 한번 냐아, 하고 울었다. 엘레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발을 옮기자 그 아엘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게 무슨…… 뭐지……?"


알렌의 얼빠진 목소리에 숨어있던 엘레쥬 일행은 모두 그쪽을 돌아보았다.

엘레쥬의 예상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습격할 듯 그와 대치 중이던 온갖 고양이형 몬스터들이 갑자기 그냥 물러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프레드가 입을 떡 벌리는 가운데, 다리에 붕대를 감은 아엘은 어느새 친구들과 합류해 사라져가고 있었다.


"역시 저 아엘…… 아무래도 우리를 위해 일부러 저 알렌이라는 사람을 유인해준 것 같아."
"너랑 루드비히를 위해서겠지."


카디나가 씩 웃었다.


"저 아엘을 치료해준 건 너랑 루드비히니까."
"전 그냥 엘레쥬가 치료해주는 동안 붙잡고 있었을 뿐, 엘레쥬의 선행이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 숲에 들어와서 유독 몬스터의 습격을 받지 않았던 것도, 저 아엘이 우릴 지켜주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아하. 어쩌면 간밤에 계속 들린 고양이 울음도 저 아엘이었을지도 모르겠네."


벨이 엘레쥬를 보며 혀를 찼다.


"몬스터한테 도움받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다."
"어쨌든 다 해결됐으니 저 추격자가 또 우리를 눈치채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납시다."


질베르크의 말에 엘레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알렌을 돌아보았다.

몬스터들이 완전히 가버렸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검을 치우지 않고 있던 그는, 이제 피난민들이 모두 무사한지 헤아려 보고 있었다.

화기애애하게 서로를 보살피며 안도하는 분위기로 보아, 알렌과 피난민들은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알렌에겐 길 가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친 상황이라 루드비히까지 포기하고 황급히 달려갔던 모양이다.


"저, 루드비히…… 네 친구 설득은……"
"응…… 일단 가자……. 지금은 알렌에게 해명하는 것보다 이 전쟁을 끝내는 게 더 시급하니까."


루드비히는 미련을 털어내듯 등을 돌리며 엘레쥬에게 사과했다.


"……아깐 소리 질러서 미안해. 너한테 다신 소리 안 지르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네가 그 약속할 때 내가 그랬잖아. 소리 질러도 된다고."
"하지만……"
"됐으니까 그만 사과해. 이러다 또 네 친구에게 들키겠어."


엘레쥬 일행이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알렌과 피난민 무리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프레드가 엘레쥬의 옷자락을 당겼다.


"누나……."
"응? 아, 다리 아프지? 그래도 조금만 더 가서 쉬자."


지금은 알렌과 거리를 벌리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해 아이를 달래려는데 의젓한 프레드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아까 그 아엘 말이에요……."
"아……"


자세히 보니 다리가 아파 힘든 표정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우리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였을까요……?"
"누나는 그렇다고 확신해."


카디나 말대로 저 아엘을 치료하는 데 힘을 쓴 사람은 자신과 루드비히다. 그리고 아엘이 준 도움은 정확히 자신과 루드비히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됐고.


"몬스터가 대부분 우리 적인 건 사실이지만…… 사실 우리도 몬스터에 대해 모르는 게 많잖아. 지성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러니 더불어 사는 게 불가능한 거겠지만, 그래도 부딪치다 보면 이렇게 종종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해."


엘레쥬는 눈을 들어 항상 맨 앞에서 일행을 지키는 벨의 등을 바라보았다.


"마족들도 그래. 프레드가 보기에 벨은 마냥 나쁜 놈에 인성 파탄자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나도 인성 파탄자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벨이 프레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못돼먹기만 한 건 아냐. 누나가 질베르크 씨한테 이 전쟁을 막자고 설득했을 때 질베르크 씨가 그랬잖아. 인간은 천사와 악마가 합쳐진 존재라고. 그 말대로 사람들을 보면 실제로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도 분명히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마족들도 분명 그럴 거야. 착한 마족도 있고, 나쁜 마족도 있는 거지."
"……누나는 저 마족을 좋아해요?"
"응. 좋아해. 프레드를 좋아하는 만큼."


엘레쥬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아이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최소한 저 마족보다는 절 더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너무 귀여워 엘레쥬는 잠시 심장을 부여잡았다.


"심쿵……!"
"네?"
"아, 아냐."


엘레쥬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프레드를 보았다.


"그럼 누나는 벨보다 프레드를 더 좋아할 테니까, 프레드도 벨을 조금만 덜 미워하도록 노력해 보자!"
"그건……! 우우…… 모르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참, 쉽지 않네.

엘레쥬는 쪼꼬만 게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벨이 들으면 뭐라고 하려나. 저딴 꼬맹이가 날 미워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그 말 철회하라고 하려나?


"빨리빨리들 안 오고 뭐 하냐."


마침 앞에서 벨이 짜증을 냈지만, 엘레쥬는 그런 그를 보며 그저 웃었다.

벨이랑 프레드가 친해지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프레드가 그를 좀 덜 미워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여기서 벨 좋다고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사실 방금 대답하기 전까진 엘레쥬 본인도 몰랐지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처음엔 벨이 싫었고, 나중에는 싫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더니 이젠 그가 좋아졌다.

자신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다. 굿 엔딩을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진짜 엘레쥬도 아마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벨만 혼자 이 일행에게서 동떨어져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다른 수호자들하고 친하게 지내라고 해서 들어먹을 놈도 아니고…….'


어쨌든 지금은 할 만큼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심정으로 프레드가 흔들리는 틈을 타 부지런히 설득해 보았다.

이제 프레드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겠지.


"이쯤에서 쉬어갈까? 그 기사님도 일행을 달고 있었으니 마음처럼 빨리 쫓아오진 못할걸?"
"슬슬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내가 이 근처에도 과일이 좀 있는지 찾아볼게."
"아, 누나! 저랑 같이 가요."


엘레쥬가 좋다며 손을 내밀자 프레드가 냉큼 그 손을 잡았다.


"이 몸이 먹을 보석도 구해와라."
"알았으니까 넌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불 좀 피우고 있든가."
"그럼 전 마실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질베르크가 자신의 짐을 뒤지기 시작하자 카디나가 으쓱하며 루드비히를 보았다.


"그럼 우린 뭐라도 사냥해 올까? 겨울이라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찾아나 보자고."
"좋습니다."


곤충까지 먹어봤다는 카디나는 사냥도 잘할 것 같지만, 루드비히는 왠지 말 타고 활 쏘는 사냥 대회나 몇 번 참가해봤을 것 같은데.

엘레쥬가 과연 저 둘의 사냥 스타일이 잘 맞을까 생각하며 걷고 있자니 프레드가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응? 뭘 찾았니?"
"그게 아니라, 실은 누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어서 같이 가자고 했어요. 누나는 저한테 매우 중요한 사람이니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엘레쥬는 약간 비장하기까지 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어, 그, 그래?"
"하나뿐인 누나니까요."


엘레쥬가 궁금한 얼굴로 대충 바닥에 앉자 프레드도 그 옆에 앉았다.


"이건 제가 대사제님을 만나기 전의 일이에요.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부모님하고 같이 살던 때 말이에요."


엘레쥬는 무릎을 가슴 앞으로 모아 끌어안았다.

안다, 이 얘기. 원작 시나리오에서 봤으니까. 프레드의 과거. 이 아이가 마족과 몬스터에게 학을 뗄 수밖에 없는 이유.

프레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냥꾼의 활에 다친 몬스터를 주워와서 밤새워 치료해주었다는 얘기를. 그리고 그날 밤 몬스터 떼가 쳐들어와 마을을 초토화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프레드의 부모님도 살해당한 과거를.


"……사실 그 아엘을 치료해주자는 누나 말을 들었을 때, 몬스터를 치료해주는 좋은 일을 하고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아……"
"그래서…… 더 화가 났어요."


프레드의 시무룩한 표정 앞에서 엘레쥬는 어쩔 줄 몰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누나가 정말 미안해……. 망각의 숲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도 그렇고……"
"아뇨, 누나. 저는 그 몬스터를 치료해줬다가 누나까지 아버지처럼 잘못될까 봐 걱정했던 거라고요. 그리고 누나는 아까도 사과하셨으니 그만 사과하셔도 돼요."


아이는 슬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희 아버지는…… 어째서 제 부모님은 선의를 베풀고도 그렇게 돌아가셨어야 했을까요……."


그 죽음에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이유가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지독히도 운이 나빴을 뿐. 반면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아서 몬스터가 은혜를 알았던 것이고.

무심코 이렇게 생각하던 엘레쥬였으나 갑자기 어떤 불길한 예감이 스쳐왔다.


"……누나?"


부모님의 시체와 타오르는 마을을 보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고, 그래서 마족과 몬스터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얘기를 털어놓고 있던 프레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엘레쥬는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아 대답 대신 황급히 프레드를 껴안았다.


"누나?"
"……아냐, 프레드…… 계속 얘기해."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려는 엘레쥬를 눈치채지 못한 아이는, 그저 엘레쥬가 자신을 위로하려고 이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뒤로는 그냥 누나도 아는 대로예요. 대사제님이 절 구해주시고, 거둬주셨지요. 많은 가르침도 주셨고요."
"……프레드, 혹시 대사제님께서 임종 직전에 했던 고백을 기억하니?"
"어떤 거요?"
"네가 사파이어의 수호자라서 거둬들였다고 했던 거 말이야……."
"아, 기억하고 있어요."


아이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사제님이 제 은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대사제님은 여전히 제게 존경스러운 분이세요. 장차 저도 대사제님처럼 훌륭한 사제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자신처럼 슬픈 일을 겪는 아이가 없도록, 마족과 몬스터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프레드는 고백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요…… 저는 솔직히 그 아엘도 그렇고, 같이 다니는 그 마족도 그렇고 여전히 마족과 몬스터는 다 싫어요. 하지만 누나가 절 냉혹한 사람으로 볼까 봐 좀 걱정이 됐나 봐요."


아이는 엘레쥬의 어깨에서 턱을 떼고 그녀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나한테는 꼭 털어놓고 싶은 얘기였어요. 다음에는, 카디나 형한테도 하고 싶어요."


아이는 시리도록 해맑게 웃었다.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까 기분이 시원해지네요! 들어줘서 고마워요, 누나!"
"아냐…… 누나야말로 얘기해줘서 고마워, 프레드."


이렇게 밝고 착한 아인데…….

가슴이 쓰려왔다.

엘레쥬는 이미 대사제의 임종을 지킬 당시, 그가 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부모 잃은 프레드를 때마침 구해서 거둔 게 대사제라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멈춰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무리 천사이자 악마라지만…… 아냐.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 이건 아닐 거야…….


"앗, 누나! 저거 보석초 아니에요?"
"아…… 그렇네."
"저는 솔직히 그 마족이 아직도 싫고, 앞으로도 쭉 싫을 것 같지만…… 누나가 너무 싫어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으니까, 지금은 그 마족이 먹을 보석을 조합할 보석초를 찾는 걸 돕는 정도만 할게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던 아이가 이내 단호하게 엘레쥬를 보았다.


"하지만 그 마족한테는 비밀이에요, 아셨죠?"


엘레쥬는 알았다며 비로소 웃었다. 어차피 벨도 프레드가 찾아다 준 보석초로 조합한 거라고 하면 안 먹겠다고 하지 않을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안 좋은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지금 확실한 건 그저, 프레드만은 역시 같은 인간이라도 마냥 천사 같다는 것 정도니까.

과일과 보석초를 채집해 돌아오니, 카디나가 벨이 피운 모닥불 앞에서 으스대며 새를 굽고 있었다.


"우와! 사냥 성공하셨네요!"
"헤헹, 내가 잡았지. 더 잡고 싶었는데 역시 겨울철이라 동물들이 많이 안 보이더라."


카디나가 프레드에게 자신의 활약을 들려줄 동안 엘레쥬는 조합한 보석을 벨에게 넘긴 뒤, 다른 한쪽에서 마실 것을 준비하고 있는 질베르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차를 내리고 있었다.


"어? 웬 차예요?"
"아쌈이라고, 먼 대륙을 건너온 홍차입니다."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지만 아쌈이라니 반갑네요. 저는 여기 우유 넣어서 밀크티로 마시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렇다면 다음부턴 엘레쥬를 위해 우유도 같이 들고 다녀야겠군요."


그러고 보니 찻잎은 그렇다 쳐도 다구까지 들고 다니시냐고 물으려던 엘레쥬는 문득 사람이 한 명이 빈다는 걸 깨달았다.


"어?"


그녀가 마냥 천사 같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이 없었다.


"루드비히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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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 엔딩에 올인 (完)
    를 구매후 감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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