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굿 엔딩에 올인 (完) 70화 응원

70. 푸른 별의 소원과 붉은 날개의 보석



기이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깜깜한 암흑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다.

그 암흑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카디나는, 허한 눈을 들어 희미하게 스며든 빛 속에서 넘실거리며 춤추는 먼지들을 응시했다.


"엘레쥬……."


카디나는 직감적으로 이 빛을 가져온 사람이 누군지 맞힐 수 있었다. 눈을 찡그리는 그에게 엘레쥬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뒤에 루드비히와 벨을 대동한 채로.


"카디나, 가자."


그나마 프레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술집이라 차마 데려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따지고 보면 저 셋 중에서도 여기 출입 가능한 나이인 사람은 마족 형씨가 유일하지 않나.


"……여긴 또 어떻게 들어왔냐."


찾아낸 건 마족 형씨의 후각 덕분일 것 같은데 미성년자인 저 둘은 어떻게 여길 통과할 수 있었을까.

잠시 그게 궁금했던 카디나였으나 바로 다음 순간 자신이 왜 굳이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답을 듣는 것이 귀찮아졌다.

정확히는 모든 게 다 귀찮았다. 그냥 다 꺼져줬으면 좋겠다.


"벨이 협…… 아니, 부탁 좀 했어."


주먹으로 부탁했다는 얘기군.

카디나는 혼자 수긍하듯 끄덕거리며 굴러다니던 술병을 들었지만 엘레쥬에게 바로 뺏기고 말았다.


"가자. 네가 마신 건 내가 다 계산했어."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
"……밥은 먹었니?"


엘레쥬가 못 들은 척하면서 한다는 얘기는 결국 또 밥이었다.

처음엔 내가 워낙 식성이 좋아서 나만 보면 밥 생각이 나는 건가 했지만, 이제는 그녀가 유독 식사 챙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어쨌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엘레쥬의 다정한 그 질문은 형이야말로 나한테 돈 보내느라 굶는 거 아니냐고 늘 걱정했던 젬을 떠올리게 했다.


"……밥 먹을 돈은 없으면서, 술 마실 돈은 있어?"
"하하…… 그놈의 밥 얘기 좀 그만할 수 없어?!"
"카디나……?"


정색하는 카디나를 보며 엘레쥬는 주춤했다. 카디나는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려대며 애원했다.


"내 몸 좀 봐…… 이게 어디 몇 끼 굶는다고 죽게 생긴 몸인가……."


왜 나만 건강해서. 왜 나만 이렇게 힘도 좋고, 재주도 좋고, 운까지 좋아서 끝끝내 외톨이가 된 건지.


"그리고 죽으면 또 어떻다고!"
"카디나 가넷!"
"나한테 제발 신경 좀 꺼!"


카디나는 벌떡 일어나 엘레쥬를 지나쳤지만 바로 다음 난관에 부딪혔다.


"상대방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아, 이 골치 아픈 바른 생활 소년이 두 번째 관문이로구나.


"좋게 말할 때 비켜라. 루드, 루이스."


술에 취해 무심코 본명으로 부를 뻔했으나 술집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해 급히 가명으로 바꿔 불렀다.

그러자 루드비히는 나도 다 아니까 모진 사람인 척은 그만하라는 듯 처진 얼굴로 웃었다.


"……엘레쥬 말을 다 듣고도 가셔야겠다면, 그때 비켜드리겠습니다."


그는 네가 과연 엘레쥬 얘기를 듣고도 갈 수 있나 보자는 식이었다. 엘레쥬는 엘레쥬대로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자신 뒤의 두 남자가 카디나를 붙잡아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고.

약 오르게도 이들의 생각은 맞았다. 카디나라도 루드비히와 벨을 동시에 상대해서 이길 수는 없었고, 엘레쥬에겐 더더욱 이길 수 없었다.

확신컨대, 이대로 엘레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될 것이다. 루드비히도 그렇게 생각해서 자신을 막고 있는 것일 테니.


"너 한 대 맞아볼래?"
"제가 한 대 맞아드리면, 엘레쥬 얘길 들어주시겠습니까?"


루드비히는 분명 긴장한 듯했지만 진지하게 물었고, 벨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마침 다 귀찮고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정 주먹질이 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지."


벨이 주먹을 틀어쥐며 팔을 뒤로 당기는 동시에 카디나도 팔을 들어 맞설 준비를 하는데 엘레쥬가 소리쳤다.


"웃기로 했잖아!"


벨도 카디나도 멈췄다.

얼어 있던 카디나가 뻣뻣하게 뒤를 돌아보니 분한 표정의 엘레쥬가 눈물 고인 눈으로 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젬의 몫까지 충실하게 산다며!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아냐고! 그런데 이런 데서 밥도 안 먹고 술이나 퍼마시고 있고! 너 같은 먹보가 참 잘도…… 밥도 안 먹고…… 술만……"


이거 봐. 결국 이렇게 또 두 손 두 발 들게 되잖아.

카디나는 쓰게 웃으며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하는 엘레쥬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피리 불어도 와주지도 않고!"
"그건 루이스랑 마족 형씨를 믿었으니까……."
"웃기로…… 했잖아……."


울든가 화내든가 한 가지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물론 넌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지만.

카디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엘레쥬의 어깨를 감쌌다.


"미안, 미안. 자…… 얼른 나가자. 여긴 공기가 너무 안 좋아."
"응……."


대로로 나오니 프레드가 기다리고 있다가 카디나에게 다가와 허리를 껴안았다.


"걱정 끼쳤네. 미안해, 프레드."
"괜찮아요……."
"엘레쥬랑 루드비히한테도 미안. 마족 형씨는…… 고마워."
"네놈한테 감사 인사 들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다."
"감사하지 않으면 괘씸하다고 할 거면서 그러신다."


키득키득 웃던 카디나가 비틀거리자 엘레쥬와 프레드가 급히 부축했다.


"괜찮아?"
"아, 술이 좀 덜 깨서 그래."
"어휴, 정말. 이 술꾼!"
"윽…… 그러고 보니 형 술 냄새나요."
"미안, 미안."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은 깨끗했다. 제 손으로 청소해본 적 없을 왕족과 황족의 작품은 아닌 듯하고…… 청소라면 질색하는 엘레쥬나 성실한 프레드 작품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카디나의 시선이 못 보던 화분에 꽂혔다.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 있는 화분 몇 개가 창가에 늘어서 있었다.


"이건 다 뭐야?"
"프레드가 로프리 출신이잖아. 꽃씨를 몇 종류 가지고 있었다지 뭐야?"
"다 키우기 쉬운 것들이라 심었더니 금방 저렇게 싹이 돋았어요."


카디나는 엘레쥬와 며칠 전 젬의 무덤 앞에서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로프리에는 더 예쁜 꽃이 많았는데…… 결국 한 송이도 보여주지 못했네…….'
'언젠가…… 로프리의 꽃을 들고, 꼭 다시 같이 오자…….'


쳐다보니 엘레쥬는 생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카디나는 마주 웃어주지 못했다.

그때 엘레쥬에게 그러자고, 언젠가 로프리의 꽃을 들고 꼭 나랑 다시 젬한테 오는 거라고, 반드시 약속한 거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그게 미안하면서 후회가 됐다.

이제 막 싹이 돋았는데 저 꽃이 피려면 대체 얼마나 더 걸릴까. 엘레쥬는 그때까지 우리 옆에 있어 줄 생각이 있긴 한 걸까?

저 꽃이 필 무렵에, 너와 함께 다시 젬에게 올 수 있을까……? 네 약속, 정말 빈말이 아닌 거야?


"……카디나? 왜 그렇게 봐?"


카디나는 젬이 엘레쥬를 만나본 뒤 제게 돌려주었던 물건을 떠올리며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흠, 그러고 보니 우리 계산할 거 남지 않았어? 배달료."


***


카디나가 요구하는 '배달료'가 뭔가 하니 성 발디나의 다리에서 알렌에게 물벼락을 내리고 도망쳤을 때 얘기였다.


'미안하지만 안 싸울 거야. 참고로 오늘 네가 배달할 사람은 나, 엘레쥬 펄이고.'
'아하…… 그렇다면 이번 배달비는 데이트로 받고 싶은데?'
'어휴, 계산은 좀 나중에 합시다?'


그 뒤로 루드비히를 찾느라, 루드비히를 찾은 뒤에는 핀 왕국으로 급히 오느라 잊고 있었던 '계산'이었다.


"데이트, 해줄 거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못 이겨 알았다고 따라나섰는데 왜 하필이면 그 데이트 장소가 정글인지 모르겠다. 물론 밤의 숲도 운치는 있다지만……


"엄마야!"
"야, 엘레쥬! 중심 잡아……!"


……낮에 다니기도 험할 곳이 밤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카디나의 손을 붙잡고 걷다가 중심을 잃는 바람에 그와 함께 넘어졌다. 카디나의 복부에 자리한 임금 왕 자는 매우 단단했기 때문에, 엘레쥬는 코를 문지르며 그의 위에서 일어났다.


"으…… 엘레쥬, 괜찮아?"
"나야 뭐 네 덕에…… 너는?"
"머리만 좀 박았어."


카디나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뒤통수를 문지르며 웃었다.


"괜찮다는 거지?"
"그럼. 네가 넘어지는 것보단 내가 다치는 게 낫지 뭘."
"그런 말이 어딨어? 심하게 박은 거 아냐? 어디 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카디나의 머리를 헤집어보자 아주 작은 혹이 만져졌다. 확실히 크게 다친 건 아닌 듯했다.


"괜찮은 것 같긴 하네……. 그러게 왜 데이트 시간과 장소가 이렇게 센스 없는지 물어봐도 될까?"
"센스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닐까?"


일어나려는 엘레쥬를 카디나가 끌어당기더니 아예 다시 벌렁 누워버렸다.


"아, 뭔데!"
"잠시만 이러고 하늘 좀 봐봐. 이야, 정말 너무 예쁜걸!"


얼떨결에 카디나의 팔을 베고 누운 엘레쥬는 눈을 깜박이며 하늘을 보았다.


"예쁘지?"
"응……."


말 그대로 별이 밤하늘을 수놓은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빙의한 것 자체는 거지 같지만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만은 축복이라고 생각한 적 있었지.

여기선 어딜 가나 공기가 좋고 하늘이 아름다웠지만, 확실히 숲에서 보는 별밤은 그 감상이 남달랐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카디나."
"엉?"
"죽은 사람이 별이 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이런 이야기가 생각나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엘레쥬의 말에 카디나는 눈을 맞춰왔다. 여전히 상심이 깃든 눈이었지만, 만취 직전까지 마셨던 아까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그런 건 애들한테나 해주는 말이잖아."
"으응, 그렇지……. 그런데……"


젬은 분명 저렇게 아름다운 별이 되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착한 아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너한테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해.


"……그러게……. 저기서 별이 된 가족들이 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네."


막상 입 밖으로 꺼내기가 뭣해 망설이고 있었더니 카디나는 알아서 알아듣고 개운하게 웃어 보였다.


"붉은 날개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을 테고 말이야."
"카디나……."


카디나는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손으로 엘레쥬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고마워, 엘레쥬."
"……뭐?"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살짝 충격에 휩싸인 엘레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디나를 보았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정말 산더미지만…… 너한테도 말할 수 없는 사정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네가 괴로워했다는 거 알아."
"카디나, 그게……"
"네가 그랬지. 데스티니 스톤을 찾을 수 있다면 너 역시 너무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다고."


엘레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소원이 뭔지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카디나는 아무래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네 말이 다 이해 가더라. 그래…… 만약 데스티니 스톤이 망자도 되살려내 준다면, 너도 네 스승님을 살리고 싶겠지."


아. 그때 수호자들의 시선이 제게 모였던 것이 기억났다. 카디나만 엘레쥬의 소원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아닌데…… 내 소원은 그런 게 아닌데…… 아냐, 카디나. 그만해……. 난 너만큼 이타적이고 훌륭한 사람이 못 돼. 못 돼서…… 내 소원은 그렇게 숭고한 게 아니야…….


"……방금 한 얘기도 그렇고, 이렇게 별도 보고 있자니 마침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네."


카디나가 마침 생각났다는 그 얘기는 사실 엘레쥬도 잘 아는, 거문고자리 설화였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돌려받고 싶어 저승까지 찾아간 오르페우스.

아름다운 리라 연주를 곁들인 그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저승의 신 하데스는 저승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고 당부하며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아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불안했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밖으로 나온 순간 뒤를 돌아보게 되고, 아직 저승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던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 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카디나. 대사제님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준 거울 기억나?"
"당연하지. 갑자기 몬스터가 사람으로 변했던 충격이 잊힐 리가. 게다가 마법 거울이니까 팔면 비싸게 받겠다고 생각했거든."


엘레쥬는 잠시 그를 흘겨보았고, 카디나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근데 갑자기 그 거울은 왜?"
"내가 루드비히랑 그 거울을 돌려주러 갔을 때, 나르시스 씨가 그러셨어."
"나르시스…… 그러고 보니 그 거울은 원래 인어의 호수에 사는 세이렌한테 받은 거였다고 했지?"
"응……."
"그래서 그 세이렌이 뭐라고 했는데?"
"……사신이 이미 거둬간 생명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카디나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아마 우리 인간들 모두가 바로 이 이야기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일 거야."
"……그래."


카디나도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처음에 이 설화를 들었을 때 생각했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죽은 가족들 생각에 얽매여 절망하기보단, 남은 젬하고 둘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자고……."


결국 그 젬도 가족들 곁으로 가버렸지만.

카디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탄했다.


"이런 이야기들도, 원래는 그 녀석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모았던 건데 말이지……"
"젬한테?"
"응. 그 녀석은 몸이 약해 돌아다니질 못하니까 내가 대신 많은 것을 보고 알려주고 싶었지. 하지만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라 들려주지 못했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부족하더라……. 그래도 이렇게, 너한테라도 들려주고 나니까 아주 무의미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


카디나는 팔을 접어 엘레쥬를 품으로 당겨 안더니 엘레쥬가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쨌든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 하나는 방금도 했지만 고맙다는 말. 이렇게 동생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도 화내서 미안했고. 넌 이미 실피드로 가는 길에도 나한테 신호를 줬던 건데, 내가 멍청하게 눈치 못 채서……"


이 얘기만 나오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동시에,


"젬이 내 걱정 속에서 눈 감지 않게 해준 것도 고마워."


도저히 못 참겠다.


"나는 딱히……"
"한 게 없다고 하지 마."


카디나가 단호하게 말을 막았다.


"나는 네 덕에 더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었어. 그 녀석도 이제 더는 병으로 고통스러울 일 없을 거야. 네가 만들어준 팔찌 덕에 더 편히 쉴 거고. 네가 아니었으면 난 완전히 외톨이었겠지. 프레드를 만나게 해준 것도 너니까. 너는 존재만으로도 젬을 안심시켜줬어. 네가 아니었다면 그 애는 끝까지 내 걱정 속에서 외롭게 죽어갔을 거야.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는 잠시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하늘을 봤다.


"하…… 젬이랑 다른 가족들이 정말 별이 돼서 날 보고 있는 거라면 웃어야지……."


다시 머리를 내려 엘레쥬를 보는 그의 미소는 별처럼 밝았다.


"엘레쥬, 잠깐 돌아 앉아봐."
"왜?"


엘레쥬가 물으면서도 순순히 돌아앉자, 카디나는 뒤에서 엘레쥬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한쪽으로 치웠다.


"카디나……?"


돌아보려는 순간 뭔가가 가슴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동시에 뒤에서 찰칵, 하고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이니 별처럼 빛나는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가슴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읏차."


다시 엘레쥬를 돌려 앉힌 카디나가 감탄한 얼굴로 천천히 손뼉을 쳤다.


"역시 생각대로 잘 어울리네."
"서, 설마…… 설마 이거 블루 가넷이야?!"
"……원래 보석술사들은 보석 선물을 받으면 그런 것부터 먼저 따져?"
"파란 가넷은 엄청 희귀하단 말이야! 오죽하면 가넷은 파란색 빼고 다 있다고 여겨졌던 적도 있을 정도……!"


흥분해서 떠벌리던 엘레쥬는 카디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진지한 카디나의 얼굴이 거기 있었으니까.


"그게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두 번째 말. 내 마음이야."
"카디나……"
"엘레쥬, 널 좋아해."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수호자가 10명인데 언젠가 누구 하나는 고백하겠지. 아니, 한 명 이상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물론 그 처음이 설마 에리카일 줄은 몰랐다.

자신이 진짜 엘레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리안이 고백해올 줄도 몰랐고. 아니, 솔직히 그게 진짜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그다음 고백은 엘레쥬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고대했던 사람의 고백이었는데…… 설마 그 고백이 몽중 고백일 줄은 정말 몰랐지.

그리고 바로 지금도.

다음 순서가 카디나일 줄도 몰랐다. 게다가 설마하니 카디나의 고백이 가장 정석적인 프러포즈일 줄도 몰랐고.

아마 카디나 다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엘레쥬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당황할 것이다.

물론 수호자들의 마음이야 다 알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은 쥬얼 프린세스 엘레쥬이고, 이들은 그녀를 수호하고 사랑할 운명을 지닌 공략 캐릭터들인데.

특히나 젬은 요 며칠 사이, 카디나의 눈을 피해서 엘레쥬에게 그간 모아둔 형의 편지를 열심히 보여주었다. 남의 편지를 막 읽어도 되나 싶어서 몇 번 거절했지만, 그 편지를 읽으니 엘레쥬는 아이가 바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형이 누나를 이만큼 좋아해요. 그러니까 형 좀 받아주세요. 저 없이 혼자 남을 형이 불쌍해요. 제발 우리 형 좀 부탁해요.

마음만 먹었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도 카디나를 사랑한다고, 네 형의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그렇게 젬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아이는 형이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설령 카디나를 사랑하게 됐어도 그랬을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같이 굿 엔딩을 보는 건 피하려고 했겠지.

……지금도 이미 그러고 있듯이.


"나도 알아. 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은 나 같지 않다는 거."
"카디나, 난……"
"이제 나는 약값 때문에 돈을 벌 필요가 없어. 동생에게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여행할 필요도 없어졌고. 데스티니 스톤을 찾을 이유는 더더욱 없어졌지."


엘레쥬는 조금 띵한 기분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원작에서 그는 그 뒤로도 계속 엘레쥬와 여행을 해줬으니까.


"하지만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으며, 동생 몫까지 충실히 살려 해."
"……웃으면서 말이지."
"그래, 웃으면서."


카디나는 여봐란듯이 웃어 보였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이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붉은 날개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그래. 여행은 계속할 거야. 솔직히 파괴신이니 보석 수호자의 사명 같은 거 여전히 와닿지는 않지만…… 네가 네 사명을 완수하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정말 고마워, 카디나…… 하지만 난 있지……"
"아직 내 말 안 끝났으니까 다 듣고 대답해."


엘레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디나는 진지한 얼굴로 웃었다.


"내가 진짜 끝내주게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너 그냥 나랑 살면 안 될까? 이제는 널 위해 살고 싶어. 우리라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야. 우리의 사명이 끝난다면 나랑 같이 의적 활동을 하는 거야. 붉은 날개와 핑크 펄! 죽이지 않아?! 너라면 가능하다고!"


웃어도 되나 싶으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꾸 가방을 털어가는 게 짜증 나길래 한번은 엘레쥬도 카디나의 가방을 슬쩍하고 잊고 있는 거 없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뒤늦게 놀라더니 자신과 동업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카디나의 진지한 얼굴이 떠오르니 어디 웃음이 안 나올 수 있어야지.


"……난 진지한데."


엘레쥬는 손을 뒤로 해 목걸이를 풀었다.


"네 마음은 정말 기뻐, 카디나."


아마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에게 백 번도 더 설레서 홀랑 넘어갔을 거라고.

엘레쥬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게 내 대답이야."
"……동업은 안 해도 되는데."


애써 가볍게 말하는 그의 배려를 알았다. 부담스러울까 봐 그런다는 걸. 덕분에 엘레쥬의 마음도 아까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 뭐,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김빠지는 건 어쩔 수 없네. 나로선 널 붙잡을 수가 없는 거지……?"
"미안해, 카디나. 날 위해서 살고 싶다는 네 마음은 정말 기쁘지만, 이제는 널 위해서 살아."


널 위해 살아라.

그것은 엘레쥬의 몸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던 말이기도 했다.


"너는 평생 남을 위해 살았잖아. 직전까지도 젬의 병을 낫게 하려고 데스티니 스톤을 찾아다녔던 거고. 하지만 카디나, 네게는 이미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 보물보다 더 귀한 보석이 있어."


엘레쥬는 팔을 들어 하늘의 별을 가리켰다.


"너에게 있어 운명의 보석이란, 분명 젬이었을 거야."


전설 속의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 쥬얼 헌터는 끝내 그 보물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보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흔하지만 확실한 교훈을 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가 젬에게 들려주기 위해 모아왔다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분명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가 있으리라.


"돌고 돌았지만, 붉은 날개는 결국 데스티니 스톤보다 더 귀한 보석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았어. 이제 만질 수 없다 해도, 젬은 저 하늘에 있잖아. 그러니 이젠 정말로 너 자신을 위해 살아. 너한텐 자유라는 보물도 남아있으니까."
"하…… 너 말이야, 그런 소리까지 해주면서 단념하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어……?"
"그런 말을 해주는 널 포기하라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이 아가씨야."
"아니, 난……"
"됐고. 그렇다면 최소한 이 목걸이라도 받아주라."
"뭐? 안 돼! 그럴 수 없어!"


엘레쥬는 손사래를 치며 그의 손에 목걸이를 쥐여주었다.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인데, 이거라도 받아주라니 더 부담된다.


"블루 가넷이 얼마나 귀한 줄 몰라서 막 주고 다니지 아주!"
"이 목걸이는 블루 가넷이라 귀한 게 아닌데."


엘레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보니 카디나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나도 한 번은 팔아버리려고 했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
"젬의 약값 때문에?"


의아하긴 했었다. 블루 가넷이 얼마나 희귀한데, 진작 팔아서 동생의 치료비나 생활비로 쓰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게.


"응…… 근데 젬이 그러면 화낼 거라고 했지. 이건 아버지가 어머니께 청혼할 때 선물했던 보석이라……"


그러고 보니 카디나의 마법 무기, 두 자루의 쌍검의 이름이 생각났다.

티르팡. 그리고 블루 가넷.

이 보석 목걸이가 그에게 오죽 귀했으면 마법 무기에도 블루 가넷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래서 내가 팔아버리지 못하게 최근까지도 그 녀석이 보관하고 있었어. 근데 가기 며칠 전에 나한테 돌려주면서 그러더라. 그거 엘레쥬 누나한테라면 줘도 된다고…… 주면서…… 형의 신부가 되어달라고 말하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받을 수 없어."


두 사람은 그때부터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마음 받아달래? 그냥 이 목걸이라도 받아달란 거잖아!"
"아니이! 마음을 받아줄 수 없으니까 받을 수는 없다는 거잖아!"
"어차피 주인 없는 물건이라니까? 이제 젬의 신부한테 줄 일도 없으니까……!"
"나중에 네 신부한테 줘!"
"와! 방금 청혼을 거절한 사람이 바로 그런 소릴 한다고?!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두 사람의 다툼은 정글을 나와 실바로 돌아가는 길에도 이어졌다. 이러다 밤새 싸우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카디나가 절충안을 냈다.


"그냥 너 이 목걸이 가지고, 나중에 나한테는 마법 무기나 하나 만들어줘!"
"뭐어?"
"그러면 됐지? 죽이는 놈으로 하나 만들어주기다!"


마침 정글을 빠져나온 카디나가 빠른 손을 이용해 다시 엘레쥬의 목에 목걸이를 철컥 걸어버리더니 손만큼 빠른 발을 이용해 그대로 튀었다.


"네가 내 마음을 안 받아준다고 해도 젬 역시 네가 갖고 있길 바랄 거야!"


고백을 받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받은 뒤는 더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엘레쥬는 쫓아가 내가 만든 마법 무기가 갖고 싶으면 따로 만들어줄 테니 목걸이 가져가라고 2차전을 시작하려 했으나, 결국 실바로 돌아온 순간부터 카디나하고는 잠시 휴전해야 했다.

파빌리온과 실피드의 전쟁 소식 때문에.

작품 보기닫기
  • 보유 코인
  • 코인

  • 굿 엔딩에 올인 (完)
    를 구매후 감상합니다.
  • 대여
    코인
    소장
    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