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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벨제뷔트와의 만남



보석초의 숲 중간쯤에서 부지런히 보석초를 캐다 보니 유난히 많이 캐진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엘레쥬는 드디어 루드비히에 이은 두 번째 버디, 벨제뷔트를 목격할 수 있었다.

기다렸던 만큼 거침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더니 벨제뷔트는 세상 까칠하게 반응했다.


"누구냐!"
"아, 나는 엘레쥬 퍼……"
"흐음…… 이 냄새는…… 진주인가? 너, 진주 갖고 있지? 내놔. 배고프니까 진주든 뭐든, 보석 내놓으라고."


루드비히 때와 마찬가지로 일단 편하게 대화해 보고자 통성명부터 시도했지만 벨에게 그딴 상식이 먹힐 리 없었다.

자기소개의 'ㅈ'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한국인 2030에게 이렇게 자기소개 욕구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도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지만.'


앞에서 누가 무슨 생각을 하건, 제 용건만 줄줄이 말하는 벨제뷔트를 보며 엘레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떼잉, 쯧. 파이어 아게이트는 대체 아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건지.'


어쨌든 엘레쥬 수중에 그가 원하는 만큼 고급스러운 보석이 있을 리 없었다. 죄다 보석 파편들 뿐이니까. 루드비히한테 답례했던 것처럼 조합해서 줄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지금 단계로 조합할 수 있는 건 고작 조각뿐이었다. 그녀가 아는 벨이 '이딴' 파편이나 조각에 만족할 리 없었고.


"자, 그럼 일단 내가 가진 거 다 보여줄 테니까 한 번 골라 봐."


엘레쥬는 가진 건 이게 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예 휴대 가방을 시원하게 뒤집어엎었다.

태도가 아니꼽고 캔 것이 아깝긴 해도 버디인데, 친해져 보려는 노력이나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예상은 했으나 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뭐야?! 이 몸더러 이딴 가치도 없는 돌멩이를 먹으라는 거냐?!"
"가진 게 이것뿐인걸. 방금 다 보여줬잖아. 자, 다시 봐봐."


엘레쥬는 속으로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되뇌며 가방 바닥까지 까뒤집어서 그가 볼 수 있도록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벨제뷔트는 여전히 코웃음만 쳤다.


"흥! 그딴 건 보석 축에도 들지 않는다. 진주를 갖고 있지? 그걸 내놔."
'진짜 딱 한 대만 때려봤으면.'


아마 네가 맡은 그 진주의 향기는, 쥬얼 프린세스이자 진주의 수호자이기도 한 엘레쥬 본인의 체취일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솔직히 엘레쥬로서도 정말 보석이 있다면 주고 싶었다. 이 녀석이 보석을 대체 어떤 방식으로 먹는지 궁금해서라도.

유저들은 그가 '어떻게 보석을 먹는지' 궁금해하곤 했었다. 강철 이빨을 지녀 보석을 와작와작 씹어먹는다 여기는 유저도 있었고, 보석 안에 응축된 에너지만 어떻게 뽑아내서 섭취한다는 설을 제기하는 유저도 있었다.


'드라큘라처럼 뾰족한 송곳니라도 있으려나?'


이렇게 엘레쥬가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벨제뷔트는 혼자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자그마한 분홍빛 조개에서 탄생해 그 무엇보다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향기를 담고 있는 영롱한 진주…… 제길 배가 더 고파졌군."
'이 대사는 참…… 대놓고 벨이 엘레쥬에게 빠진다는 복선이네.'


지나치게 적나라한 그 대사가 왠지 좀 낯부끄럽기도 해서 머리를 반쯤 비우고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더니 벨이 최후통첩을 날렸다.


"자, 더 말하지 않겠다. 너 같은 호박이 가진 것보다는 나의 이 공복을 채우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 진주로서도 행복할 것이다."


그는 참 재주도 좋았다. 노력해도 안 사라지던 수치심이 사라지고 짜증이 치솟았으니까.


'후. 그래, 참자. 화내지 말자. 얘한테는 화내봤자 소용없다. 소귀에 경 읽기다.'


여기서 호박을 무지 싫어하기까지 하는 엘레쥬라면 필시 발칵 화를 냈겠지만, 우리의 새로운 엘레쥬는 호박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았다. 못생겼다는 말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얜 내 진짜 얼굴을 모르고, 엘레쥬 얼굴만 보고 말하는 거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얼굴은 진짜 내 얼굴이 아니지.

이건 사족이지만, 그녀는 호박이나 호박꽃이 그렇게까지 특별히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대체 왜 호박이 못생김의 대명사가 됐는지 잘 모르겠다.

뭐 어차피 어디 벨에게 짜증 날 만한 게, 못생겼다고 놀림 받는 것 하나뿐이겠는가. 심지어 앞으로 확 갖다 버리고 싶을 만큼, 더 많이, 많이, 많이, 많이 짜증 날 텐데.


'어차피 벨이 패주고 싶은 성격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디 한번 잘 참아봅시다.'


찐레쥬는 몰랐으니 화도 내고 싸웠겠지만, 우리의 뉴레쥬는 벨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드비히가 역적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부터 이미 마인드 컨트롤을 대충 마친 상태였다. 아마도.

엘레쥬는 속으로 무적의 긍정 주문을 외웠다.


'얘는 어차피 2D다……. 과몰입해서 2D한테 열 내지 말자……. 얘한테 화내는 건 다키마쿠라한테 화내는 거랑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지금 다키마쿠라랑 연애해서 굿 엔딩을 찍어야 하는 뭣 같은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참자…….'


엘레쥬는 옷의 주머니까지 다 까뒤집어 보여줬다.


"아니, 글쎄! 다 보여줬잖아. 없다니까? 여기도 봐봐!"
"어디서 그런 개수작을! 네가 몸 어딘가 숨기고 있는 것쯤은 냄새로 알 수 있다!"


그랬다. 엘레쥬도 체취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냄새가 난다는데 어쩌겠는가.


'몸에 무슨 악취라도 묻혔어야 했나.'


하지만 그랬으면 아예 벨하고 접점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어쨌든 엘레쥬도, 특히나 한국인으로서 배고프면 화가 나는 것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굶주린 벨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하다니, 죽이고 빼앗아주마! 억겁의 지옥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광기의 불꽃이여!"


어휴, 진짜로 이렇게 되는구나.

벨은 다짜고짜 엄청난 마법을 시전하는 듯했지만 엘레쥬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냥 한껏 비웃음을 장착하고 해보란 식으로 응시해줬다.


"그 꺼지지 않는 화염으로 나의 적을 휘감아……! 윽!"


원작대로 벨은 마법을 시전하다 말고 별안간 풀썩 쓰러져 버렸다.


'초반의 벨은 마황제한테 마력을 대부분 뺏긴 상태였지.'


엘레쥬는 혀를 한 번 차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곧 한 하급 마족이 나타나서 이놈을 데려갈 차례였다. 그냥 버리고 가도 알아서 주워갈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기절한 사람을 그냥 놔두고 가기가 좀 뭐 했다.

일어나면 배고플 텐데 지금이라도 보석을 조합해서 조각이라도 주머니에 넣어줘야 하나?


'아니지, 뭐가 예쁘다고.'


어차피 쓰레기라며 먹지도 않을 것 같은데 괜히 힘들게 캔 보석초를 낭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음에 만날 때 살아있을 테니까 지가 알아서 굶어 죽지는 않겠지 뭐.'


곧 파랗고 덩치가 큰, 이 보석초의 숲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낯선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 몬스터는 벨을 들춰 매고는 엘레쥬에게 꾸벅 인사했다.

시나리오로 봤을 때는 그냥 인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왠지 우리 주인이 폐 끼쳐서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욕 좀 봐!"


상사가 싸놓은 대변을 대신 치우는 부하 직원 같은 모습에, 사회생활을 하다 온 한국인으로서 마음 깊이 측은지심을 느낀 엘레쥬는 그 몬스터에게 최대한 상냥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몬스터가 벨을 데리고 사라지자 엘레쥬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흩어진 보석초 파편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휴대 가방에 쓸어 담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벨도 만났겠다, 곧 경비대에 쫓기는 루드비히를 도와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내일부터는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 마을 아이 중에서 돌을 잘 던지는 애들을 수소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투석 실력이 좀체 늘지 않으니.

돈 준다고 하면 지원할 마을 아이들이 한둘이 아닐 듯한데, 이거 무슨 오디션 프로처럼 경합이라도 벌여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이제 또 벨이 문제야. 엘레쥬가 이다음에 벨을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스토리의 줄기, 커다란 흐름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만 세세한 대사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억하는 대로, 기억나는 대로 일기장에 적어두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솔직히 있던 확신이 없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국왕 하랜드가 시해된 이후로, 그리고 고대하던 루드비히와 만나진 이후로 증상이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가끔은 현실 감각 자체가 없어지곤 했다. 그렇잖은가. 내가 게임 속 주인공이 되었다니.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나타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다 아시죠!' 하고 껄껄 웃으며 자신을 놀릴 것만 같았다.

그래, 정말 그렇게 놀려줬으면 좋겠다. 아이, 뭐예요! 하면서 정말 깜빡 속았다고 말하고 싶다. 속인 사람들을 때리지 않을 자신도 있는데.

엘레쥬는 잠시 발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원래 살던 곳이 그리워질 때면 이렇게 하늘을 봤다. 인종과 언어, 의복 등의 문화가 다 다른 곳에서 같은 것이 있다면 저 하늘뿐이었으니까. 그마저도 이쪽 하늘이 훨씬 더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이렇게 미세먼지 없이 청명한 하늘을 보면 비록 세탁기는 없지만, 여기도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엘레쥬는 원작을 해치는 행위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냈다.

만물상점에서 그 문제의 원석을 본 순간 갑자기 훼까닥 돌아버린 적은 있긴 했지만, 그건 반쯤은 제 의지가 아닌 상태로 저지른 짓이었으니까.

이런 몇 가지 사례만 제외하면 갖은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는 결국 게임의 흐름대로 진행 중이었다.


'현실 부정하고 의심할 시간에 더 열심히 떠올려볼 걸 그랬나 봐.'


실제로 에리카가 놀러 와서 핑크 펄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녀는 엘레쥬가 원래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니, 처음에는 이게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었다. 뒷걸음치다 쥐 밟은 격으로 얼떨결에 시나리오대로 흑진주 얘기를 했던 것이니까.


'솔직히 엘레쥬가 벨하고는 무슨 얘기를 하든 거의 싸웠다는 것밖엔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루드비히와 벨제뷔트 둘 다 참 전형적인 첫 만남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루드비히와 달리 벨제뷔트와는 첫 만남부터 최악이라는 점.

그건 애석하게도 버디가 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가 엘레쥬하고만 싸운 것도 아니다.

고귀하신 마황태자 즈은하의 성격은 워낙 개차반이시라 수호자 대부분이랑 꼭 한 번씩은 돌아가면서 영역 표시라도 하듯 그야말로 개싸움을 했다. 성격 좋은 루드비히나 카디나도 욱할 수밖에 없는 말을 자주 했으니까.

심지어 이 팀에는 벨 말고도 다른 의미로 성격이 더럽…… 아니, 안 좋은 '실눈캐'도 하나 있었다. 그 전에 마족과 완전히 상극인 사제까지 있고.


'와, 벌써 뒷골 땡기네…….'


게임할 때야 싸우는 게 불구경이었지만 지금은 뜯어말릴 생각만으로도 머리털이 뭉텅뭉텅 빠질 것 같았다.


'어쨌든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보자.'


집으로 돌아온 엘레쥬는 씻고 나서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며 일기장을 꺼내 벨제뷔트 루비라고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오늘도 마침 아만다가 외출한 터라 혼자 편하게 생각하기 좋았다.

첫 만남에서 벨제뷔트는 배가 고프다며 엘레쥬를 죽이고 보석을 빼앗으려다 마력 고갈로 쓰러졌다. 바로 오늘 일어난 일이다.

엘레쥬는 첫 만남 옆에 체크 표시를 해두었다. 시나리오대로 무사히 헤쳐나왔다는 의미로.


'그럼 두 번째 만남은……'


두 번째 만남에서는 메피스토랑 싸우다 얼결에 넘어져 엘레쥬와 뽀뽀하게 되면서 마력을 되찾았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엘레쥬와 처음 입술 박치기를 한 상대가 벨제뷔트였다는 점, 첫 키스를 뺏겼다며 엘레쥬가 억울해했던 데다가, 무엇보다 입을 맞추고 있는 보배로운 이벤트 CG가 딸려 있어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는 에피소드였다.


"아마 이때였을까……?"


엘레쥬가 벨제뷔트에게 뭔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그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엘레쥬를 제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하고, 루드비히와 삼자대면을 하게 되는 에피소드에서는 눈이 뒤집혀서 다짜고짜 그를 공격한다. 명백한 질투였다.

그리고 아마 그다음 삼자대면 때에도 루드비히에게 엘레쥬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을 퍼부으며 자신이 직접 엘레쥬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그가 버디로 추가된다.


'하여튼 조만간 벨에게 뭔가 겁나 깊은 인상을 남길 방법을 생각해 보자.'


뽀뽀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받아주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예쁜 여자만 보면 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놈인데다가 나중에 나올 이자벨도 그렇고, 벨은 연애 경험이 많은 버디인 것 같으니까 고작 뽀뽀만으론 안 될 수도 있어.'


엘레쥬는 일단 일기장을 덮어 다시 침대 밑에 숨겨놓고 몸을 누였다. 워낙 피곤한 놈팡이를 상대해서 그런지 오늘은 오래간만에 잠이 솔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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