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라시드의 수호자
"오, 오드 아이는……! 오드 아이는 라시드 왕족만이 가지는 특징이라고 들었어요!"
엘레쥬는 케니스가 물러나지 못하게 그의 망토를 꽉 붙잡으며 다급히 수습에 나섰다.
"그러니까, 책에서 읽었다고요!"
짧은 시간 속에서 판단했다. 여기서는 다 속이려 들지 말고, 일부는 거짓말하더라도 일부는 아는 것을 털어놓자고. 그게 더 효과적일 것 같다고.
하지만 고작 이 정도 말로는 케니스의 의심이나 불신을 지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엘레쥬는 따발총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팔 당신 눈을 보니 그게 방금 기억났어요! 말해두는데, 오해하지 마요. 당신 눈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에요. 예쁘다고 한 거, 비꼬거나 한 게 아니라 진심이라고요! 방금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 한 것도, 당신이 오해할까 봐 해명하려다 막 나온 말이랄까…… 그러니까, 당신이 라시드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한 거라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나간 거라고요! 내가 당신을 경비대에 고발하거나 할 일도 절대 없어요! 생각해 봐요! 메피스토가 저를 노리는데 저로서도 날 되도록 해치지 않으려 하는 당신이 메피스토의 하수인으로 있는 게 유리하지 않겠어요? 당신 말고 다른 하수인이 생긴다면 그자는 기회만 되면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는데!"
당사자인 자신도 스스로 뭐라고 지껄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윽고 케니스가 몸에서 힘을 뺐다. 알아들은 걸까?
적어도 들어는 보겠다는 것 같았다.
엘레쥬도 비로소 그의 망토를 놓아주고 조금 진정했다. 다행히 최근 로프리 도서관에서 일부러 라시드 관련 책을 대출해온 적이 있어서 비교적 술술 말할 수 있었다.
"라시드는 진실의 돌, 오팔을 지키는 사막의 왕국이라죠? 그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의 손에는 오팔이 박혀있고요. 오팔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했을 때 싫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심지어 방금 당신은 좋아하는 과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선인장 열매라고 대답했어요. 그냥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당신이 라시드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피부는 희지만……"
"……정말로 그게 단가."
엘레쥬는 침을 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럼 뭐가 더 있나요?"
"쥬얼 프린세스."
"엘레쥬라고 불러요."
그러나 그는 무시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나?"
엘레쥬는 멈칫했다. 질문이 뜬금없기도 했지만, 그 질문이 가리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배드 엔딩.
케니스 오팔은 쥬얼 프린세스와 파괴신의 전쟁 뒤에 감춰진 진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 직감이 왔다.
그렇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주인공답게, 그게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희생한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전 할 수 없어요."
엘레쥬는 케니스를 믿기로 했다.
아마도 아직은 아니겠지만, 운명대로라면 그는 엘레쥬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희생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물론 엘레쥬가 희생하는 배드 엔딩이라는 루트 자체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레쥬를 그렇게 보내고 살아남은 수호자들이 그 뒤로 동화처럼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수호자들은 아마 평생 엘레쥬를 구하지 못했다는 괴로움과 죄책감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12대 수호자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수호자들 역시. 분명히.
눈앞의 케니스는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고, 감정이란 것이 거의 거세당한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한 질문인지는 물론이거니와 엘레쥬의 대답을 들은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엘레쥬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저의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유도 설명해야 할까요?"
"……넌 날 믿는다고 했다."
이유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나 본데, 이유가 필요없다면 방금 그 질문은 내 의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나?
"그래요. 믿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널 속이고 있다면……"
들썩거리던 케니스의 복면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감정이 거의 읽히지 않던 그의 눈동자 속에서 드디어 당황이라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역시 저도 모르게 한 말인 것이다.
말하던 중간에 자신이 엘레쥬에게 이런 질문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지금의 그와 엘레쥬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잠깐 휴전 중인 적에 가까울 것이다.
만약 내가 널 속이고 있다면?
아니, 애초에 속일 수밖에 없는 사이가 아닌가.
"……이해할 수 있어요."
엘레쥬는 케니스와 눈을 마주치며 선선히 대답했다.
그는 제게 호의를 보여주었다. 비도 피하게 해주고, 장작도 찾아다 주고, 몬스터들도 죄다 정리해주고, 지금은 따뜻한 가슴도 빌려주고 있다.
이전에도 그랬다.
그의 암살 시도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긴 어려웠고, 폐광에서도 메피스토만 챙겨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루드비히까지 굳이 찾아다가 유인해왔다. 그 때문에 본인은 예상치 못하게 끼어든 벨제뷔트 루비라는 골치 아픈 적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혀버리고 말았고.
엘레쥬를 돕는다고 그에게 득 될 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번거로운 일만 늘어나지 않았는가. 벨은 루드비히 이상으로 번거로운 상대니까.
그런데도 그는 오늘도 자신을 도와주었다.
지금은 비록 메피스토 밑에 있다고 해도, 그 역시 쥬얼 프린세스를 위한 보석의 수호자였다.
"이번에는 이유가 궁금하겠죠. 하지만 난 이미 아까 말했어요."
그러나 케니스는 전혀 감도 못 잡는 눈치였다.
"……당신이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닐 거라는 걸 아니까. 내겐 내 사정이 있듯이, 당신에겐 당신의 사정이 있겠죠."
이건 결코 엘레쥬 본인이 착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도리어 케니스와 자신이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서 하는 소리에 가까웠다.
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마황제의 명에 따라 메피스토의 악행을 돕는 그.
굿 엔딩을 보기 위해서 파빌리온 국왕 시해 같은,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을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제 사람 중 한 사람을 황천의 길동무로 삼으려는 자신.
과연 둘 중 누가 더 나쁠까?
'오히려 나겠지.'
엘레쥬는 속으로 냉소했다.
케니스는 최소한 누군가…… 본인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하는 일이다. 협박에 이기지 못해서 하는 일이고.
하지만 자신은?
순전히 본인이 원래 살던 세상과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제 사람들을 지키긴커녕 그중 하나를 희생시키려 하고 있고.
빙의한 이상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한다. 누군가 무조건 너만 다 나쁜 거라고 말한다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 원해서 빙의한 게 아니니까.
그래도 이게 본인 의지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본인이 노말 엔딩으로 이 쥬얼리아에 남는다는 선택지를 걷어차고, 굿 엔딩을 '선택'했으니까.
"아까 한 말의 반복이에요. 앞으로도 당신은 계속,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거라고 했잖아요. 그중 누군가를 속이는 일쯤은, 아마도 우스운 축에 속하겠죠."
엘레쥬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보았다.
"오팔, 당신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나요? 나는 과연 아무도 속이지 않을 것 같나요?"
케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렇게 착해 보인다면 고맙긴 한데, 세상에 한 번도 남을 속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너 역시 나를 속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군."
"그건…… 하…… 좋아요. 만약 그렇다면, 그러는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요?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면?"
모순적이게도, 엘레쥬의 날 선 태도가 오히려 그를 완전히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그편이 덜 수상하게 보이는 건지…… 남자들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지자 엘레쥬도 덩달아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이런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죠. 당장 다음부터 다시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는 판국에 굳이 지금부터 서로 피곤하게 날 세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에 엘레쥬는 아무 말이나 뱉어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여기 이름은 왜 천년 여우의 동굴일까요? 여우형 몬스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하나도 없던데. 로쿠네라도 한 마리 있든가. 아직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몬스터 도감에 따르면 로쿠네는 인어의 호수 근처부터 출몰하는 몬스터라고 그러더라고요. 여우의 귀랑 꼬리가 달려있대요. 오팔은 인어의 호수까지 가본 적 있나요? 로쿠네를 실제로 봤어요?"
그야말로 그냥 말을 돌리려고 한 말이었다.
산책로면 산책하기 좋은 길이어야 하는데 당최 왜 몬스터가 나오냐는, 이전에 루드비히를 만나기 직전에 했던 엉뚱한 단상이랑 같은 유의 농담에 지나지 않은 말.
"……이 동굴 이름이 천년 여우의 동굴인 건 몬스터 로쿠네와는 상관없다."
뜻밖의 대답에 엘레쥬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3대 쥬얼 프린세스는 수인족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인족도 많이 사라져, 지상에 남은 수인족이라고는 핀족이라고 불리는 소수족뿐이고 그마저도 서서히 멸족 위기에 처하고 있다지만……"
엘레쥬는 잠시 말을 멈춘 그의 마음이, 멸망한 라시드에 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핀족들처럼 소수만 남았을 그의 백성들에게.
"어쨌든 당시에는 여우 수인족도 있었다고 하더군."
"아…… 그럼 3대 쥬얼 프린세스가 여우 수인족이었다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는 건, 당신의 이야기 흐름상 이 동굴에는 그 3대 쥬얼 프린세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얽혀있나 보군요. 혹시 들려줄 수 있어요?"
"기억나는 건 그 쥬얼 프린세스의 이름이 데이지 토파즈였다는 것뿐이다. 라시드가 멸망하면서 기록이 모두 사라져, 지금은 다시 찾아서 읽어볼 수도 없지."
"아까운 일이네요……."
좀더 영양가 없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화제를 돌린 건데, 어째 다시 우울한 화제로 돌아와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케니스가 제 입으로 인정했네. 자기가 라시드 왕국의 후예라는 거.'
카디나보다 더 음지의 세계에 몸담은 만큼, 그 역시 아직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수호자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이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져서.
바로 지금도 그렇다. 케니스는 역시 라시드를 위해서라도 희생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었다.
케니스 오팔은 단순한 보석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는 라시드의 수호자였다. 죽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라시드의 가능성을 무사히 수호하고 있는.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대로라면 누구하고도 굿 엔딩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
"죽도록 걱정했어."
"정말 미안……."
루드비히는, 엘레쥬가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목욕물을 몇 번이고 끼얹어서 밤새 몸에 밴 모닥불의 불 냄새를 날리자마자 아론과 함께 들이닥쳤다.
간밤에, 이전 몽유병 사태 때처럼 또 마을 사람들이 새벽까지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얘길 들으니 죽도록 미안했다. 심지어 비까지 내리는 밤이었으니 정말 입이 열 개라도 사과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목욕하면서 루드비히에게만큼은 조심스레 사실을 말할까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역시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간밤에 케니스와 싸움은커녕 협조한 끝에 무사히 돌아왔다지만, 일단 그는 메피스토의 하수인이었다.
아더를 조종해 하랜드를 죽인, 루드비히의 원수 밑에 있는 부하.
"음…… 분명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밤에 또 돌아다녔나 봐. 고생시켜서 미안해, 루이스."
졸지에 이젠 다 나았는데도 몽유병 환자 행세를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루드비히는 당분간 또 며칠 엘레쥬의 집에 머물며 밤마다 파수꾼 노릇을 자처할 것 같았다.
그 밖에도 아론에게 꿀밤을 한 대 맞았고, 같이 온 마을 의사 선생님에게 필요 이상으로 꼼꼼한 진찰을 받았다.
엘레쥬를 병약 여주 취급하는 사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엠마였는데, 이게 다 기가 쇠해서 그런 거라며 온갖 비싼 해산물을 쪄왔다. 핀 왕국의 보양식이라나 뭐라나.
배가 안 고픈 건 아니었지만 추운 동굴에서 비가 그친 새벽까지 쪼그리고 쪽잠을 잔 탓에 잠이 훨씬 더 절실했다. 나중에 꼭 먹겠다고 거의 사정을 했는데도, 엠마는 버티고 앉아 식고문 수준으로 퍼먹였다.
30분간 언니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먹었더니 체하다 못해 보양식 효과가 다 사라질 것 같았지만 먹는 걸 멈추면 잔소리 폭격이 더 심해졌기에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합으로 2시간 반 정도가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난 엘레쥬는 오늘 채집은 쉬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피곤했다.
"그럼 푹 쉬어. 옆에 있어 줄까?"
"정말 괜찮아. 가서 일 봐. 어…… 낮 동안은 내가 몽유병으로 돌아다녀도 금방 누군가한테 발견될 테니까, 응?"
"그럼 저녁에 다시 올게."
"응. 이따 봐."
루드비히는 그래도 탐탁지 않은지 또 위험한 물건을 죄다 모아 창고에 갖다두고 창고 열쇠를 가져갔다.
빨리 자고 싶었던 엘레쥬는 어수선하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제발 빨리 가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없이 사라져 걱정시킨 죄인이었기에 그냥 인내했다.
그렇게 드디어 루드비히를 보내고 침대로 들어가 3초 만에 잠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창문을 통과하는 햇볕이 고통스럽게 느껴져서 잠에서 살짝 깼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눈은 떠지지 않았다. 목도 찢어질 것 같았다.
'으으, 기어이 감기 걸렸어…….'
주변인들이 앞으로 자신을 얼마나 더 과잉보호하려고 들지 생각하니, 기운이 더 빠졌다.
'하…… 뜨거워……. 햇볕이라도 좀…….'
혼자서 끙끙거리면서도 눈도 뜨지 못하는데 촤아악, 하는 소리가 들리며 창문에 커튼이 쳐졌다. 햇볕이 약해지니 그것만으로도 좀 살 것 같았다.
"루……?"
루드비히, 너야?
'역시 내가 걱정돼서 돌아왔구나…….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뒤이어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이 얹어졌다.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정신이 들었나.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더 자도록 해."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엘레쥬는 찬물 세례라도 맞은 양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오…… 오팔……? 당신이에요? 어, 어떻게……?"
"들어올 생각은 없었는데 안에서 앓는 소리가 들리길래. 이걸 흘리고 갔더군."
케니스가 보여준 것은 보석초 채집 도구였다.
동굴 속에서 그의 품에 기대 깜빡 졸아버렸다. 눈을 뜨니 그 역시 눈을 감고 졸고 있기에 곁에 과일 몇 알과 곰곰 젤리만 놓고 조용히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그때 젤리를 꺼내다 흘렸던 모양이다.
"고, 고마워요…….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그는 끄덕이더니 그대로 나가버렸고, 엘레쥬는 약간 황당한 얼굴로 문을 보았다.
어…… 설마 간 건가? 이렇게 그냥? 인사도 없이?
잠시 기다려봐도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다시 잠이나 자려고 하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코가 막혀서 이제 알았는데, 약간 쓰고 독특한…… 약초 같은 냄새였다.
비척거리며 그 냄새의 행방을 따라 주방으로 가보니, 커다란 냄비에 웬 수프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설마…… 케니스가……?"
국자로 조금 떠서 맛을 봤다.
아우…… 감기 때문에 미각까지 잃었나 봐.
하지만 몇 번 더 떠먹고서야 알았다. 이건 원래 이런 맛이라는 걸. 약초 같은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약초를 넣고 끓인 수프인 것 같았다.
'케니스 연애 이벤트 중에서 케니스가 아픈 엘레쥬를 간호하면서 엄청나게 쓴 수프를 끓여줬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이게 그 수프인 것 같았다.
"버릴 수도 없고…… 먹어야겠지?"
미각이 조금이라도 맛이 간 지금 먹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집 앞에 같은 수프가 놓여있을 줄 몰랐기에 할 수 있었던 기특한 생각이었다.
한 번 먹은 걸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나머지는 케니스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버리려 하였으나 루드비히가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엠마 씨가 끓여다 주신 거라며. 정성이 담겼는데 버리는 건 실례 같아. 무엇보다 몸에 좋은 거라면 먹고 빨리 낫자."
울며 겨자 먹기…… 아니, 울며 무지 쓴 수프 먹기였다.
사흘 만에 털고 일어난 엘레쥬는 루드비히가 의뢰를 나간 사이 몰래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그가 돌아오면 볼 수 있게 걱정하지 말라고 쪽지를 남겨두었다.
'산책로면 별로 멀지도 않고, 강한 몬스터도 없으니 괜찮겠지. 솔직히 루드비히가 너무 극성인 거라고.'
집에 갇혀있었던 사흘 만에 완연한 가을이 찾아온 것 같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훑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와 보석초의 숲 쪽을 쳐다보니 단풍이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보석초의 숲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입구 근처에서만 잠깐 단풍만 구경하다 오면.'
루드비히는 책을 좋아하니까, 단풍잎을 말려서 책갈피로 선물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님이니까 금박 같은 걸 입힌 고급스러운 책갈피나 써봤지, 이런 계절 냄새나는 책갈피는 처음이지 않을까?
'루드비히라면 분명 좋아할 거야.'
왕자님이라지만 귀족적이기보다는 순박하고, 꽃도 화려한 것보다는 이름 모를 작은 들꽃을 좋아하는 그라면 낙엽 책갈피도 좋아할 것 같았다.
어영부영하다가 전에 결심했던 꽃 선물도 해주지 못했으니까 단풍잎 책갈피라도 꼭 주고 싶었다.
엘레쥬는 들뜬 마음으로 보석초의 숲으로 달려가 단풍잎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연히 제일 예쁜 잎을 찾기 위함이었다.
근처에 은행나무도 몇 그루 있어서 결국 은행잎도 같이 추리기 시작했다. 은행잎의 샛노란 색깔이 루드비히의 머리카락을 연상케 해서, 자꾸 더 예쁜 걸 주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엘레쥬는 고개를 꺾어 나무 위를 보았다.
나무 타본 적은 없는데…… 나 같은 초짜가 올라가면 위험하겠지?
그래, 위험한 짓은 하지 말자. 떨어져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이젠 루드비히가 멀쩡한 평지에서도 업고 다니려고 할지도 몰라.
미련을 떨치고 은행나무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눈앞에 불쑥 은행잎 하나가 내밀어졌다.
"누구…… 어? 오팔!"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우수에 찬 오드 아이가 물끄러미 엘레쥬를 담고 있었다.
"어…… 나 주는 거예요?"
케니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쥬는 그의 손에서 찢어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한 은행잎을 조심히 가져갔다.
'그런데…… 굿 엔딩을 다 떠나서, 루드비히 줄 걸 다른 수호자한테 받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런 생각에 받아놓고도 머뭇거리는데 케니스가 이번에는 수통을 꺼내 내밀었다.
"어…… 또 그 수프인가요?"
끄덕이는 그를 보니 차마 안 받을 수가 없어서 눈물을 삼키고 받았다. 대신 이번엔 마침 딱 만났으니 확실히 하기로 했다.
"이제 이 약초 수프 안 가져다줘도 괜찮아요. 정성은 고맙지만…… 이렇게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나았거든요. 사실 어제도 밖에 못 나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루드비히 잔소리가 스승님 뺨쳐서……"
"……엘레쥬?"
그 스승님 뺨치는 잔소리꾼의 목소리였다.
엘레쥬가 질겁해서 돌아보니, 루드비히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케니스를 보고 있었다. 그 청록색 눈동자에 경악이 가득 담긴 채.
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