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굿 엔딩에 올인 (完) 126화 응원

126. 소원의 마녀의 포춘텔링



직전까지는 무조건 빨리 죽어 없어지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왕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은 좀 더 가치 있게 죽고 싶었다.

예컨대 저 라그스페넨과 동귀어진하는 거다. 아니, 제 능력으로 거기까진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저 괴물에게 조금이라도 더 강한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사용한 다이아 슬래쉬는 효과가 있었다. 생명력을 소모하는 금기라 그런 것인지 드디어 좀 속 시원한 유효타가 들어갔다.

그래. 이 정도도 하지 않고 그냥 죽는다면, 자신의 기사 앞에서 내겐 운명을 개척할 의지가 있다고 큰소리쳤던 게 무색하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문제는 엘레쥬였다.


"너! 그 마법 또 쓰면 내가 다신 너 안 본다고 했어, 안 했어?!"


엘레쥬의 다크 볼트 마법에 호되게 얻어맞았다.


"허억…… 엘레쥬……! 검, 돌려줘……!"
"어림없는 소리! 너 다신 나 안 볼 셈이야?!"


차마 거짓말이 나오지 않아, 숨이 차서 고개를 떨구는 척 시선을 피했지만 엘레쥬에게 그런 요령은 통하지 않았다.


"루드비히…… 그렇게…… 그렇게나 괴로운 거야?"


엘레쥬…… 또 나를 위해 울어주는 거야?

책에서 본 적 있었다. 평생 몇 번 울지 않는 인어들이 흘린 눈물은 굳어져서 보석이 된다고. 그래서 인어의 눈물이 그토록 구하기 어려운 거라고.

하지만 이 자리에 그 인어가, 그것도 인어의 공주님이 계시는데도 루드비히는 어째서 이 소녀가 흘리는 눈물은 진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저 값진 눈물을 자신처럼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 흘리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무리 자신을 위해 울어준다고 해도, 엘레쥬의 눈물은 볼 때마다 항상 마음이 너무 아프다. 역시 저 눈에서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으면. 자신처럼 무가치한 사람을 위해서 흘리기에는, 엘레쥬의 눈물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러니 울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 두통이 재발하며 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래…… 너는 나약하고 어리석고 무능해. 그런 너는 쥬얼 프린세스를 가질 수 없어. 네가 가진 애들 장난 같은 힘으로는 엘레쥬 펄을 지키지 못해. 절대로. 하지만 '나'라면 가능하지.'


너는…… 가능하다고?


'그래, '내' 힘이라면 가능해. 마법도 필요 없어! '내'가 가진 고유한 힘만으로도 저 라그스페넨을 상대할 수 있다고! 그러니 어서 그 몸을 '내'게 넘겨!'


나는 다이아 슬래쉬로 내 생명력을 소모해도 저 정도인데…… 너는 마법도 쓰지 않고 저 거대한 괴물을 상대할 수 있다고……?


"……루이스 캐럿!"


소녀의 부름에 의식이 돌아왔다. 약간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 보였다.

이로써 루드비히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본래 자신이 쓰던 검을 엘레쥬에게 맡긴 다음 다른 검을 찾았다. 블랙 다이아몬드의 검을.

'놈'의 물건은, 특히 이 검은 아무리 내다 버려도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어느새 그의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항상.

그는 옹고롱고의 정글에서 이 검을 불길 밖으로 걷어차 버렸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엘레쥬의 입술을 덮치고 있던 자신이 그녀를 더 상처 입힐까 두려워서.

그때 분명 그렇게 버렸는데, 그러니 그 직후 엘레쥬를 구하러 온 토파즈의 수호자와 싸울 때 무기가 없어 맨주먹으로 싸웠던 건데, 오팔 수호자와 함께 해변을 달리며 알렌에게 쫓기고 있을 때 이 검은 이미 그의 수중에 돌아와 있었다.

그 뒤로도 계속 그랬다. 그와 알렌이 번갈아 가며 몇 번이고 버렸지만, 이 귀신 들린 듯한 검은 득달같이 루드비히에게 돌아왔다.

이건 요검이다. 아마 이 몸의 진짜 주인이 확실히 결판날 때까지는 계속 루드비히에게 달라붙으리라.

루드비히는 만류하는 엘레쥬를 외면한 채, 블랙 다이아몬드의 그 요검을 잡았다.

자아가 삼켜지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편안했다. 마지막 순간에 또다시 자신을 루이스 캐럿, 이라고 불러주는 엘레쥬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 이거면 됐다. 엘레쥬를 지켜낼 수 있다. 가치 있게 사라질 수 있다. 그녀를 지켜내는 건 루드비히 블랙 다이아몬드일지언정, 엘레쥬의 기억에 남는 건 루이스 캐럿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레쥬의 만류가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다. 아니……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지라도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 블랙 다이아몬드의 힘을 빌려 엘레쥬를 지켜냈다. 아만다 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도 알렸다. 그러니 이제 정말 미련은 없었다.

알렌에게 사과하지 못한 게 조금 걸리지만, 엘레쥬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제 다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짜로 그렇게 다 놓아버리려던 순간이었다.

루이스 캐럿.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 마법 같은 이름이 그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날 위해서 움직여줄 수 있어?"


엘레쥬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루드비히, 날 위해 죽어줄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빛이 들어왔다.

아, 엘레쥬는 내게 더 가치 있는 죽음을 선사해주려는 거구나.

그래, 항상 헛되이 죽기는 싫다고 생각했다.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는 건 싫다고.


"……우리, 우리의 운명을 한 번…… 시험해보자……."


엘레쥬는 서럽게 흐느끼면서 속삭였다.


"꼭…… 꼬옥 죽어야겠다면…… 죽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면은…… 후으윽…… 여기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려고 하지 말고? 응……? 조금만 더 참, 참았, 다가…… 참았다가아…… 날 위해애…… 죽어줘……."


더 가치 있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도 엘레쥬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야. 아직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그래, 이런 것보다는 조금 더 값어치 있는 죽음을 맞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자.

역적 왕자도, 루드비히 블랙 다이아몬드도 아닌. 엘레쥬 펄이라는 특별한 소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소년 루이스 캐럿이자, 쥬얼 프린세스를 지키는 보석의 수호자 루드비히 다이아몬드로서 죽도록 하자.

세상을 구할 공주님을 위해.


"이겨내, 루드비히. 나하고 같이…… 굿 엔딩을 보자."


영혼의 그릇 안에서 직접 사령과 맞서는 루드비히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놈은 마지막 순간까지 격하게 저항했다.


'하던 대로 도망이나, 칠 것이지……! 마지막 기회라고 했을…… 텐데! 겁쟁이 넌 기회를 다 썼……단 말이다! 으으윽! 다이아몬드의 수호자! 보석의 수호자인 너는 절대로 쥬얼 프린세스를 구할 수 없어! 그래, 보석 수호자 중 그 누구도! 엘레쥬……! 나만이 널 지킬 수…… 어째서 이런 겁쟁이를……!'


이전까지는 주객이 전도된 마냥 놈이 루드비히를 찍어 내렸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루드비히가 위에서 놈을 찍어누르며 버텼다. 단 한 번도 우위를 내주지 않았다. 놈을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엘레쥬를 위해 죽겠다 결심한 이상, 더는 흔들리거나 질 이유가 없었다. 비록 여전히 혼자서 이겨낼 수는 없었지만, 엘레쥬가 나르시스 씨의 거울과 아쿠아마린, 메일슈트룸을 써서 도와줄 때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제 눈을 가리던 칠흑의 가면과 제 손에 피를 묻히던 요검이 박살 난 뒤부터는 언더라켄의 복구 작업을 도우며, 틈만 나면 계속 엘레쥬가 비밀스레 속삭였던 말들의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우리의 운명을 시험해보자는 건 무슨 뜻이고, '굿 엔딩'을 보자는 건 또 무슨 뜻일까.

질베르크 씨의 말대로 엘레쥬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루드비히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화제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눈치챘다. 자신이 그녀를 슬프게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죽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보이면, 마음씨 고운 엘레쥬는 반드시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척, 더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엘레쥬가 잠깐 여관 밖에서 둘이서만 보자고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에메랄드 공녀만 따돌리고 금방 나올 테니 기다려 달라더군요."


드디어 왔구나.


"……응, 고마워. 좀 늦어질 것 같으니까 알렌 먼저 자."
"바닷바람이 많이 찹니다. 엘레쥬에겐 이미 따뜻하게 입으라고 말해두었으니, 전하께서도 따뜻하게 입고 나가십시오."
"고마워, 알렌."


여관 밖으로 나오니, 알렌이 주인에게 말해둔 것인지 두꺼운 털 담요 두 장이 올려진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알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나올 걸 그랬지.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루드비히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형님 문제도 그렇지만 알렌이 저를 너무 따르는 게 걱정이었다.

가족들까지 다 버리고 따라와 주었다. 본인의 가장 큰 치부라고 생각했을 출생의 비밀까지 다 털어놔 주었다.

그런 알렌에게 내가 새로운 가족이 되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충성이나 우정이 아닌 우애를 나눌 수 있다면, 그 녀석에게 내가 혈육 이상의 존재가. 핏줄이나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진짜 형제가 되어줄 수 있었다면.

……내가 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나 자신한테…… 나 자신의 어둠에 지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살면서 그렇게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회한에 차 주먹을 꽉 쥐고 있자니 뒤에서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드비히는 얼른 벌떡 일어나 반갑게 돌아보았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여관 안에서 나온 아가씨는 엘레쥬가 아니었다.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다시 앉았다.

에리카를 따돌리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가 보다.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나온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엘……?"


그새 엘레쥬가 나왔나 싶어서 봤는데 아니었다. 방금 나온 그 아가씨였다.

근데 왜 와서 앉는……?

당황한 얼굴로 보자 아가씨는 대뜸 물었다.


"이름."
"……예?"
"이름."
"그…… 루이스 캐럿입니다."


그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거 말고 본명 말이야."


루드비히가 바로 경계 어린 표정을 짓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질문을 바꿀게. 네가 운명의 소녀에게 선택받은 수호자니?"
"……예?"


루드비히는 살짝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뭐지, 이 사람?


"네가 엘레쥬의 선택을 받은 수호자냐고 물었어."
"어…… 엘레쥬를 아십니까?"
"그래."


안 그래도 수호자라는 말이 걸렸는데 엘레쥬랑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하지만 엘레쥬의 지인이라고 해도 쥬얼 프린세스나 수호자 얘기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 텐데. 호크아이 씨나 엠마 씨만 봐도 전혀 모르시는 것 같고…….


"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둔하구나, 너."
"네?"
"뭐, 됐어. 내 이름은 파파라챠 놀스. 포춘텔러 길드에서 왔어. 엘레쥬가 원하면 가끔 카드 점을 봐주곤 했지."
"아……"


루드비히는 모호한 미소를 보냈다. 그는 점 같은 건 잘 믿지 않았다.

물론 엘레쥬는 종종 미래를 예지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아가씨가 진짜배기 포춘텔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수확제 시작하는 날에도 봐줬었는데 엘레쥬가 그런 말 전혀 말 안 하디?"
"예, 전혀……"


어쨌든 지인은 맞는 모양이니 일단은 엘레쥬가 나올 때까지 말 상대라도 해주는 게 좋겠지?


"좋아, 그럼 이 주사위부터 받아."
"감사합…… 아니, 갑자기 왜 이런 걸 저한테 주시는지……"


제 손바닥 위로 떨어진 주사위를 본 루드비히는 습관적으로 인사하다 어리둥절해져 놀스를 보았다.


"그건 사랑을 이뤄주는 주사위야."
"네?"
"그 주사위의 마법을 사용하면, 엘레쥬와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다소 불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루드비히에게도 어느 정도의 상상력쯤은 있었다. 특히 엘레쥬를 만나 모험을 시작하게 된 이후로는 어지간한 비현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감도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묘약과도 같은 효과를 내는 주사위라…… 그런 마법이 정말 실재한다고?

이 점성술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주사위는 그가 아는 그 어떤 마법하고도 다른, 완전히 새로운 마법이었다.

상처를 치유하고, 악한 것을 정화하거나 불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통상적인 마법하고 완전히 동떨어진.


"우리 길드의 위대하신 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사랑을 이뤄야만 이 세계가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러셨어. 자, 어서 그 주사위를 굴려서 엘레쥬와 사랑을 이뤄!"


루드비히는 고개를 저으며 그 주사위를 도로 포춘텔러에게 돌려주었다. 이 주사위의 터무니 없는 마법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놀스는 미간을 좁히며 루드비히를 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엘레쥬는 나비입니다."


루드비히는 단호하게 말했다.


"팔랑팔랑 날아다닐 때 가장 아름다운 나비요."


상대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걸 각오하고 한 거절이었지만, 솔직히 루드비히의 기분도 썩 좋지는 않았다. 이 마법이 사기면 사기인 대로 기분 나쁘고, 진짜면 그런 짓을 강요받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지 않은가.

아니, 솔직히 어쩐지 이 주사위 자체가 꺼림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뜻밖에도 포춘텔러 아가씨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시는지……"
"그런 게 있어. 실은 나도 그냥 궁금해서 시험해본 거야. 어쨌든 너희 사이는 걱정할 필요 없는 것 같네."


혼자만 아는 듯한 말을 맘껏 중얼거린 그녀는 갑자기 품 안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빠르게 섞었다. 그리고 그중 여덟 장을 골라 루드비히에게 내밀었다.


"한 장만 뽑아."
"저기, 사실 저는 이런 점 같은 건……"
"어서!"


어쩔 수 없이 여덟 장의 카드 중 한 장을 골라 포춘텔러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엘레쥬랑 아는 사이라고 하니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이 카드가 맞아?"


내가 어쩌다 믿지도 않는 이런 카드 점을 보게 됐나.

루드비히는 자포자기해서 끄덕여주었다.


"좋아, 그럼 카드를 뒤집겠어."


뒤집은 카드의 앞면에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더 행드맨. 매달린 사람의 알카나구나."


놀스의 표정은 미묘해서 뭐랄까, 점괘의 결과가 그리 좋은 내용 같지는 않았다. 물론 점을 잘 믿지 않는 루드비히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건 네 사랑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야. 너, 운명의 소녀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어?"


풀이랍시고 하는 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엘레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엘레쥬 말고 누가 있겠니."


놀스는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대답해 봐. 너, 운명의 소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


루드비히는 저도 모르게 조금 진지해져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아가씨의 점성술이 진짜라는 보장이 없다는 희미한 경계심마저 잊고.

놀스의 얼굴 역시 더없이 진지하고 복잡했다.


"고통스러울 거야."
"괜찮습니다."


루드비히는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분명 고통스럽겠지만, 둘의 사랑은 깊어질 거야."


그 말에 루드비히는 생각했다. 역시 점 같은 건 믿을 게 못 된다고.

그래서 놀스가 복채로 100골드를 요구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째 당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뭐야, 그 한숨은? 사랑에도 돈이 필요한 거야. 얼굴만 보고 어떻게 사니?"
"그게 아니라…… 저는 사실 점을 잘 믿지 않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점을 봐버린 셈이니 복채는 드리겠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점을 볼 의향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시고……"
"아니, 왜 안 믿는다는 건데?"


괜한 말을 한 걸까. 놀스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좀 미안해진 루드비히는 물러나려고 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아니, 빨리 말해 봐. 얼른!"


그러나 상대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그냥…… 원래 안 믿습니다."
"난 길 가면 발에 채는 그런 어중이떠중이들하곤 달라."


뭐 그럼 어떤 점쟁이가 스스로 사기꾼이나 가짜라고 말하고 다니겠는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무례한 말을 삼키며 루드비히는 그냥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지만, 눈앞의 포춘텔러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체 왜 내 점괘를 못 믿겠다는 거야?"


결국 루드비히는 차라리 사실을 말해서 빨리 보내버리자는 생각으로 답했다.


"어…… 파파라챠 씨?"
"이름으로 불러."
"그럼 놀스 씨, 아까부터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엘레쥬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놀스 씨는 일단 점 봐줄 상대부터 잘못 고르셨어요."


아니, 그건 피 토하는 심정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껏 남은 피 토하는 심정으로 비참한 하소연을 하는데, 이 사람은 왜 아까부터 저런 표정으로 날 볼까.

심지어 한숨까지 내쉰다. 한숨 쉬고 싶은 게 누군데.


"그럼 네가 생각하는, 엘레쥬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지?

대답을 회피하려 얼버무리는 듯한 미소를 짓자 포춘텔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예?"
"엘레쥬한테 물어봐.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어? 꼭이야!"


놀스는 그렇게 신신당부하며 기어이 루드비히에게서 복채 100골드를 뜯어냈다.


"그럼 난 돌아가 볼게. 행운의 별이 너의 머리 위에서 빛나기를."


어쩐지 대하기 어려운 아가씨가 드디어 사라졌다. 한숨 돌린 루드비히가 긴장을 풀고 의자에 늘어지려는데, 이번에야말로 엘레쥬가 나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엘레쥬는 후다닥 곧은 자세를 유지하는 루드비히를 향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코코아를 내밀었다.


"아냐. 나도 방금 막 나왔어. 여기 앉아."


자리를 비켜주자 의자에 앉은 엘레쥬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얼굴로 장난스레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그냥 엘레쥬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 뒤로 코코아를 마시며 정말 긴 대화를 나눴다. 알렌에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이야기를.

이 쥬얼리아가 그녀에게는 이야기 속 세상이라는 것, 따라서 사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영혼만 와서 '엘레쥬 펄'이라는 소녀의 몸을 차지하게 된 것에 불과하며, 이 몸의 주인인 엘레쥬가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 등을.


"그간…… 많이 힘들었겠구나."
"응?"
"아만다 님이랑 에리카, 정말 좋아하잖아."
"……아, 그거. 한때는 나도 안 좋아하려고 나름대로 애써봤지. 에리카는 그냥 가벼운 이웃 사람처럼 생각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진짜 친구가 되어버렸고, 스승님 상대로도 나름대로 벽도 쳐보고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진짜 가족이 되어버려서…… 내 마음인데도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으응, 나도 그 마음 잘 알아."
"뭐, 그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닌 진짜 엘레쥬면 어때. 내가 좋아하면 됐지."


역시 엘레쥬는 대단하다고, 루드비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그게 안 돼서 너무 괴로웠기에. 항상 엘레쥬가 욕심났기에.

나 따위가 감히 널 좋아해서는 안 되는데. 내 처지에 그런 언감생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 건데.

그는 엘레쥬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매 순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역시 그 마음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근데 엘레쥬는 자기가 좋아하니 다 괜찮단다.

착잡함을 감추며 그렇다면 네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엘레쥬는 어느 순간부터 기억나지 않으니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라고 했다.

어느 순간 진짜 자신을 잃었다면서도 덤덤한 엘레쥬가 신기했다.

루드비히도 메피스토가 사령을 심은 이후, 수시로 자기 자신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온전한 본인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저지른 일들은 결국 그가 죽을 작정까지 하게 내몰았다.

그런데 엘레쥬는 어떻게 저렇게 덤덤할 수 있는 걸까. 진짜 자기 몸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줄곧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며 자기 이름자조차 잊어버린 상황에서. 심지어 본인의 원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어쨌든 엘레쥬의 비밀들은, 파괴신이 실재한다는 사실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네가 가끔 미래를 내다봤던 것도……"


일단 믿어 보면 그간 이해할 수 없던 많은 것들이 이해되니까.


"응……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젬이 죽을 거라는 것도, 네가 메피스토에게 지배당할 거라는 것도, 알렌이 자기 남은 수명의 절반을 써서 널 구하려 할 것이라는 사실도 다 그래서 알고 있었어. 물론 네가 메피스토 손에 떨어지는 건 막지 못해서 이렇게 됐지만…… 어쨌든 난 뭐 대단한 예지력 같은 걸 가진 게 아니야. 좀 실망했지?"
"그럴 리가.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그렇게 묻는 엘레쥬의 표정이 갑자기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어쩐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루드비히는 놀라 물었다.


"엘레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엘레쥬는 눈시울을 붉히며 가늘게 떨었다.


"엘레쥬……? 대체 왜……"
"이 바보야! 정말 모르겠어……? 난…… 나는 네 아버지가……! 하랜드 폐하께서 시해당하실 거란 사실도 다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 말을 내뱉은 엘레쥬는 이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거의 통곡하는 수준이라 루드비히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간 혼자서만 끙끙 앓느라 많이 힘들었던 정도로 그치는 고통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이전에 엘레쥬가 지나가듯 던졌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아마도 실피드에서 프레드에게 사랑에 관해 조금 어려운 질문을 받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랬구나. 엘레쥬 너는 혼자 이 낯선 세상에 갑자기 뚝 떨어져 줄곧 외톨이라고 느꼈겠구나.

안타까움이 밀려오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끊임없이 울며 자책하는 엘레쥬가 가진 부채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 무엇 하나도 엘레쥬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녀와 나눴던 많은 대화 중,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로프리에서, 천년 여우의 동굴에서 채집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눴던 대화였다.


'네 형님은 무위로는 파빌리온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고 들었어. 맞아?'
'어? 어…… 당연하지. 형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파빌리온이 아니라……'
'됐고! 그럼 너는 이길 수 있어?'
'그럴 리가! 형님은 나 같은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난 네 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한 게 아니야! 그때 네가 그렇게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덤벼들어봤자 개죽음만 당했을 거란 얘기가 하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네가 그렇게 개죽음을 당했으면 이 나라는 진짜 구원의 여지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네가 그때 잘 도망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최소한 나 하나는 진실을 알게 됐어. 너 하나에서 나까지 둘이 됐어. 물론 고작 나 하나로는 별로 위안은 안 되겠지만……'
'그,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엘레쥬…… 네가 얼마나…… 네가 얼마나 내게 큰 의미인데…….'
'……그렇다면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내 앞에서만이 아니라, 생각도 하지 마. 살아있는 것보다 귀한 건 없는 거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생각해 보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엘레쥬가 원래 살던 곳에서 쓰던 격언 같은 것인 모양이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네가 거기서 네 형을 막겠다고 달려들었어도 결과가 변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게 강하다는 네 형한테, 너까지 당했을 거야. 선왕 폐하 한 분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 안타깝지만…… 네 아버지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을 거야. 네 형이 네 아버지에게 칼을 꽂은 그 순간부터…… 그러니까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


어쩌면 엘레쥬는 이때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줄도 모르고, 이때 자신은 엘레쥬에게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걸까.

이번에는, 엘레쥬가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엘레쥬를 달랬다. 그녀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엘레쥬 네가 날 위해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시는 걸 어떻게든 막아줬어도, 메피스토는 뭔가 일을 쳤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마 내가 메피스토라도 다른 길을 찾았을 거야."
"예컨대 형님이라는 길이 막혔다면…… 내가 그 길이 됐을 수도 있었겠지. 실제로 난 최근까지도 메피스토한테 지배당하고 있었고 말이야."
"네가 뭔가 했든 하지 않았든 메피스토가 있는 한, 비극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가족을 덮쳤을 거란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메피스토라도 전쟁을 시작하려면 전쟁 경험도 많고, 군사력도 강한 파빌리온을 이용하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혹은 네가 막지 못한 일이 다 의미 없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네가 전에 내게 해줬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이니만큼, 역시 네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어.

엘레쥬 펄은 항상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줬는데 감히 배은망덕하게 원망이나 한단 말인가.

심지어, 원래 죽을 운명이라는 아더 형님도 살려보자고 말해주는 엘레쥬인데.

엘레쥬에게 한 모든 말이 다 그의 진심이었다. 그는 엘레쥬에게 무척 감사했다.

그녀가 막지 못한 일이 다 의미 없지는 않다. 오히려 그녀가 하는 일만이 유의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 아닌가.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진짜' 엘레쥬가 해야 했을 그 대단한 위업을 대신 수행하고 있다. 아무도 감히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

전에 알렌이 했던 말이 옳았다.


'그러니…… 당신도 이겨내십시오. 당신 역시 그녀의 수호자시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그녀를 수호하는 기사이지 않습니까.'


나는 기사다. 내가 성기사 서임을 받은 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 엘레쥬를 지키는, 그녀의 수호 기사이기 때문이다. 상류층이라면 학을 떼는 카디나 씨조차 이 말은 인정할 것이다. 우리 수호자들은 모두 엘레쥬를 지키는 기사라고.

그러니 누구든 비난의 화살로 그녀의 이름이나 위업, 명예 등을 더럽히려 한다면, 당장 장갑을 던져 정당한 결투를 신청하리라.

루드비히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가까스로 진정한 엘레쥬는 마침내 남은 이야기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이 모험의 결말을.


"구전되는 이야기나 동화 중에선, 종종 나라나 지역에 따라 설정이나 결말이 다른 것도 있지?"
"어…… 예컨대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요정인 지역도 있고, 말하는 동물인 지역도 있는 것처럼?"
"응응, 대충 그런 거. 이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결말이 있었어. 일단 파괴신은 무조건 부활해.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든 결말에서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거고, 불행이라면……"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아도 우리 중 누군가가 적어도 하나씩은 죽는 결말도 있다는 거야."


엘레쥬는 크게 세 갈래의 결말이 있다며, 그 결말을 모두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배드 엔딩, 노말 엔딩, 굿 엔딩.

루드비히는 듣는 내내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현자단에, 메피스토의 정체에, 4천 년이 넘게 반복되어 온 끔찍한 봉인 의식까지.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왜…… 왜 네가……!"
"그래, 충격적이지?"


엘레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루드비히는 그녀가 애써 태연한 척한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말이 많아졌으니까.

루드비히가 모르는 척 가만히 들어주니 그녀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잘 생각해, 루드비히. 내가 아는 이야기대로라면 너는 파빌리온의 국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야."


비로소 엘레쥬가 제게 어떤 구원을 약속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엘레쥬가 말하는 노말 엔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그 역시 '평범한 결말'을 원했던 적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더 '좋은 결말'을 원했다.


"물론 우리가 아더 폐하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지겠지만, 모든 일이 끝난 뒤 누명을 벗고 나면 네 지위도 복권될 거 아냐. 그럼 넌 네 형을 보필하며 왕제로 살아갈 수 있어."


머릿속으로는 방금 놀스라는 아가씨에게서 들은 점괘가 계시처럼 스쳐 갔다.


'더 행드맨. 매달린 사람의 알카나구나.'
'이건 네 사랑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야. 너, 운명의 소녀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어?'


방금 그 아가씨 점괘, 그래도 어느 정도 믿을만한 것이었나보다.


"파괴신이라는 고비만 넘기면 여생이 평화로울 거라고. 네가 항상 바라던 대로, 파빌리온을 위해 살 수 있어."


고통스러워도 둘의 사랑은 더 깊어질 거란 풀이에 신뢰가 뚝 떨어졌었지만, 적어도 네 사랑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제 이해가 갔다.

그건 네 사랑을 '이루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말 그대로 '네 사랑을 위해', 그러니까 단순히 '네가 사랑하는 사람인 엘레쥬 펄을 위해' 네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루지 못해도 엘레쥬는 틀림없는 자신의 사랑이니까. 그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단 얘기였다.

네 사랑을 위해 희생할 수 있냐고?

답은 엘레쥬에게 질문을 받았을 당시에 진작 내렸다. 다른 답이 있을 리 없다. 엘레쥬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루드비히는 그냥 사령이 끝까지 저를 잠식하게 두었을 것이다.

루드비히는 엘레쥬와 눈을 맞췄다. 호박처럼 투명한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또 한바탕 쏟아낼 것처럼.

하지만 루드비히는 말해야 했다.

그녀 스스로 누누이 말한 대로, 엘레쥬에게 예지 능력 같은 건 없었음이 밝혀졌다. 그녀가 일부 미래를 알고 있었던 건 예지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음이.

하지만 그런데도, 엘레쥬는 그런 능력이 없었는데도 줄곧 루드비히의 죽음을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최후는 형님의 검에 참수당하는 것도, 메피스토의 사령에게 먹히는 것도, 하물며 토파즈 수호자의 손에 처단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엘레쥬를 위해 '굿 엔딩'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건 단순한 죽음이 아닌 구원이다. 엘레쥬에게도, 자신에게도.

아아, 엘레쥬. 너는 언제나 나를 구하는구나.

루드비히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파빌리온에게 검을 바쳤다.


"엘레쥬 펄. 나의 나비, 나의 파빌리온."


쥬얼 프린세스시여, 저의 목숨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날 써줘."


그러니 마음껏 쓰시길.

그는 속으로 읊조리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위해서 죽을 수 있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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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 엔딩에 올인 (完)
    를 구매후 감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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